적멸보궁

5대 적멸보궁

유프랭크지안 2017. 8. 15. 22:42

적멸보궁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신라 시대의 건축물이다.

신라 시대인 647년경(진덕왕 재위 기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慈藏)

자장(慈藏, 590년~658년)은 신라의 스님이었고, 율사로 알려져 있다.

출가하기 전에는 진골 출신의 귀족이었으며, 성은 김(金), 속명은 선종(善宗)이다.

법명 : 자장(慈藏)

출생 : 590년

입적 : 658년 (68세) 태백산 석남원(정암사)

속명 : 김선종(金善宗)

종파 : 계율종

생애

부모를 일찍 여의자, 처자를 버리고 원녕사(元寧寺)를 지어 고골관(古骨觀)을 닦았다. 이때 선덕여왕이 재상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636년(선덕여왕 5년) 왕명으로 제자 승실 등 10여 명과 당의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참알하고 가사와 사리를 받고, 불도를 닦았다.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운 뒤 643년(선덕여왕 12년) 장경 1부와 불구를 가지고 돌아왔다.

분황사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에서 [대승론][보살계본] 등을 강론하였다.

그 후 대국통이 되어 승려의 규범과 승통의 일체를 주관하였다.

또한 황룡사 9층 목탑의 창건을 건의하여, 645년에 완성하였으며, 통도사와 금강계단을 세웠다.

전국 각처에 10여 개의 사탑을 세웠고,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관복을 입게 하였다.

이어 650년 진덕여왕 때 당의 연호 사용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만년에는 강릉군에 수다사를 짓고, 후에 태백산에 석남원(정암사)을 세워 그곳에서 입멸하였다.

저서로 [아미타경의기][출관행법][제경계소] 등이 있다.

적멸보궁의 유래

석가모니가 설법을 펼친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을 뜻하는 전각으로 석가모니 사후에 와서는 그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 탑, 암자 등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보통 절과 보궁을 헷갈려 통도사 절 자체를 적멸보궁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틀린말은 아니지만 엄격히 따지자면 절 자체가 적멸보궁이 아니라, 절에서도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장소를 일컬어 보궁이라 한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진신사리라고 하며, 이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에서는 석가모니, 즉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여 다른 부처님을 상징할 수 있는 불상이나 조각을 절에 두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절의 시설은 전(殿)이나 각(閣)으로 나타내지만, [대웅전, 삼신각] 진신 사리를 봉안한 절은 보궁이라 하여 궁(宮)으로 높여 부른다.

적멸보궁은 여러 불교 문화재 중에서도 그 가치가 두드러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적멸보궁 중 가장 유명한 5개의 보궁을 꼽아 5대 적멸 보궁이라 하는데 영축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오대산 중대(中臺)상원사에 있는 적멸보궁,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영월군)에 있는 적멸보궁, 정암사(淨巖寺.정선군)의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에 있는 적멸보궁 등이다.

5대 적멸보궁과 관련된 설화와 그 역사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사리각각의 보궁과 관련된 전설은 모두 자장율사가 승려로 현신한 문수보살로부터 가사, 진신사리 100여과, 경전을 받으면서 시작한다.

해동에 불법을 밝히라는 보살의 말을 들은 후 율사는 친히 신라로 건너와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각각의 적멸보궁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비록 용과 봉황 등 전설의 동물들이 나와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의 상징과 유래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설화를 설명하고자 한다.

1. 통도사

신라로 건너온 자장율사가 가장 먼저 세우게 된 절이 통도사이다.

통도사의 건립과 관련된 전설은 절 내부에 있는 연못인 구룡지로부터 비롯된다.

예로부터 명당 자리였던 영취산 인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궁궐이나 탑을 세우려 했으나, 아홉 마리의 용들이 방해를 하는 바람에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후 절을 세울 터를 찾다가, 그가 직접 날린 나무 오리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칡꽃을 물어오는 것을 보고, 겨울인데도 생생한 기운이 살아 있는 명당임을 알아본다.

처음에 율사는 구룡지에서 용들을 설득하여 나가게 하려하지만, 용들이 말을 듣지 않자, 화(火)자를 종이에 쓰고 연못에 넣은 후 진언을 외워 물을 끓게 한 후 용들을 좇아 낸다.

그 중 3마리는 하늘로 올라가려 하다 죽고, 5마리는 골짜기로 숨는데 이 5마리 용들이 숨은 곳을 오룡곡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먼 용 한 마리가 도망가지 못해 자장율사에게 살려달라고 빌자, 이를 불쌍히 여겨 연못을 지키도록 하니 이것이 구룡지의 유래이며, 통도사 내부에 있는 구룡지는 용이 지키기 때문에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고 홍수가 나도 물이 불지 않는다고 한다.

이 이후 통도사는 남부의 대표적인 불교 중심지로써의 역할을 하게 되며, 불,법,승, 중 불(佛)을 상징하는 불교의 3대 상징 성지 중 하나가 된다.

<금강계단>

(법: 합천 해인사, 승: 송광사)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략으로 인해 절 외부의 전각이 손상되는 등 큰 피해를 입지만, 사명대사가 통도사에 있던 진신사리 중의 일부를 정암사로 옮겨놓으면서, 진신사리의 훼손은 막을 수 있게 된다.

신라 선덕여왕 재위 중인 646년에 자장 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구룡지>

창건 당시에 대웅전․적멸궁(寂滅宮)․법당 등의 건물이 있었고, 금강계단에 진짜 부처인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으므로 대웅전에는 부처의 모형인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절 이름은 영취산의 기운이 서역국 오인도(西域國五印度)의 땅과 통한다고 하여 통도사라 불렀다고 한다. 자장은 이 절에서 금강계단을 쌓고 보름마다 불법을 설하여 계율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3년 선조 36년에 송운대사(松雲大師)가 재건하고 다시 1641년 인조 19년 우운(友雲)이 중건하였다.

<사리탑>

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통도사 (지산리)

좌표 북위 35°29′17″동경 129°3′45″

2. 오대산 중대 상원사

자장율사가 오대산을 개산한 이후로, 오대산에도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하여 불교 성지로 추앙 받았으나, 이 사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아, 신비로운 전설처럼 전해진다.

상원사는 이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수호령 역할을 맡는 절이며, 이 상원사의 건립과 관련해서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자면, 상원사는 선덕왕의 두 왕자에 의해서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진여원이라 불렀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 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절을 짓고 난 후 두 왕자는 그 곳에서 수행을 했는데, 신문왕이 죽은 후 후계 문제로 다툼이 끊이질 않자, 오대산의 두 왕자를 찾아왔고 그 중 하나가 왕이 된 후 진여원을 상원사로 개명했다.

<상원사 중대 적멸보궁>

<사리탑과 탑비탁본>

고려시대에 들어 상원사에 대한 설명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다.

국교가 불교이니 만큼 불교 성지에 대한 중흥이 일어날 법도 한데, 더 이상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삼국 시대를 전후로 소실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고려 후기 이색의 오대상원사승당기라고하는 기행문에서 나옹스님의 제자로 알려진 영로암 스님이 재건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상원사는 적어도 고려 말 이후의 것이다.

그 이후 조선 시대의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인해 상원사는 자칫하면 소외된 절이 될 뻔했으나. 세조와의 인연으로 다행히 그 명성을 이어가게 된다.

현재 상원사는 월정사에 포함된 절이다.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23년(724년)에 건립되었다.

신라시대의 유물로는 국보로 지정된 상원사 동종(銅鐘)과 대리석 탑이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광복 후에 개축한 것이다.

1951년 1․4 후퇴 때 연합 사령부가 월정사와 함께 상원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승려들의 저항으로 문만 떼어내서 불태웠다는 일화가 있다.

3. 법흥사

사자산 법흥사는 선덕여왕 12년에 자장율사가 흥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흥녕사는 자장율사가 창건한 적멸보궁 중 가장 오래 머물던 곳으로 직접 율사가 수행하던 토굴이 그 뒤에 있다.

율사가 절을 세운 후에 신라의 선승들이 모여 사자산에 신라 말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사자산문을 연다.

이 사자산문은 특히 흥녕선원으로 불리며, 한국불교사의 명맥을 이어가는 선원 중의 하나로 자리잡으며, 불법의 계승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적멸보궁과 보궁내 법당>

<왼쪽 자장율사 기도토굴.  오른쪽 사리탑>

흥녕사는 고려 의종(1163)년에 중창하였으며, 조선 영조, 정조, 헌종 때까지 적멸보궁, 선문의 역할을 다해왔다. 하지만 워낙 오랜 역사를 견뎌왔기에 절의 형태는 폐사지에 가까웠다.

1902년에 대원각사에 의해 법흥사로 개칭되고 재건되었다.

4. 정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서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신라의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라고 하였다.

아침에 대송정에 가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내현하여 “태백산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라 이르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는데, 이 절이 정암사이다.

<적멸보궁>

이 절에는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자장이 이곳에서 문수보살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떨어진 방포(方袍)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와서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다.

시자(侍者)가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나무라자 거사는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시자가 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미처 깨닫지 못하고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여 만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거사는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하고 삼태기를 쏟자 죽은 강아지가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바뀌었으며, 그 보좌에 올라앉아 빛을 발하면서 가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황급히 쫓아가 고개에 올랐으나 벌써 멀리 사라져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자장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죽었는데, 뼈를 석혈(石穴)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또, 창건에 관한 일설에는 자장이 처음 사북리 불소(佛沼) 위의 산정에다 불사리탑(佛舍利塔)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붕괴되므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설상(雪上)으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水瑪瑙塔)․적멸보궁․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本堂)을 세우고, 이 절을 갈래사라 하고 지명을 갈래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 절은 창건에 얽힌 전설 외의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절 입구에는 일주문(一柱門)이 세워져 있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편에는 근년에 완공된 선불장(選佛場)이 있다.

오른쪽에는 고색(古色)의 적멸보궁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마노탑을 등에 지고 있다.

<수마노탑>

중간 도량가에 종루가 있고, 선불장 옆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자장각(慈藏閣)․삼성각(三聖閣)이 있다.

이 중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이 보궁 안에는 선덕여왕이 자장율사에게 하사했다는 금란가사(錦襴袈裟)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적멸보궁 뒤쪽의 수마노탑은 보물 제4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장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왕이 자장율사의 신심에 감화되어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싣고 동해 울진포를 지나 신력으로 갈래산에 비장해 두었다가,

자장율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이 돌로써 탑을 건조하게 했다고 하여 마노탑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물길을 따라 이 돌이 반입되었다고 해서 수 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탑을 세운 목적은 전란이 없고 날씨가 고르며, 나라가 복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

또 이 절에는 금탑과 은탑의 전설이 있다.

정암사의 북쪽으로 금대봉이 있고 남쪽으로 은대봉이 있는데, 그 가운데 금탑․은탑․마노탑의 3보탑이 있다고 한다.

마노탑은 사람이 세웠으므로 세인들이 볼 수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자장율사가 후세 중생들의 탐심(貪心)을 우려하여 불심이 없는 중생들이 육안으로 볼 수 없도록 비장(秘藏)하여 버렸다고 전해진다.

자장율사는 그의 어머니에게 금탑과 은탑을 구경시키기 위하여 동구에 연못을 파서 보게 했는데, 지금의 못골이 그 유지이며 지상에는 삼지암(三池庵)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밖에도 적멸보궁 입구의 석단에는 선장단(禪杖壇)이라는 고목이 있다.

이 나무는 자장율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은 뒤 수백 년 동안 자랐으나 지금은 고목으로 남아 있다.

신기한 점은 고목이 옛날 그대로 손상된 곳이 없다는 것인데, 다시 이 나무에 잎이 피면 자장율사가 재생한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5. 봉정암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길지를 찾던 도중, 봉황이 한 마리 나타나서 율사의 눈을 끌었다.

날아가는 봉황을 자장율사는 계속해서 따라갔고, 그러던 중 부처님을 닮은 바위를 찾게 되었다.

봉황은 부처님을 닮은 바위의 이마부분으로 사라졌고, 율사는 곧 그 주위가 수려한 산들로 둘러싸인 길지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이마를 닮은 부분에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하고 암자를 세우니, 이것이 봉정암의 유래다.

봉정암은 말 그대로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특히 봉 정암은 암자나 고승들의 수행처로 이름 높은 곳이다.

<봉정암>

자장율사가 봉정암을 세운 이래로, 원효, 보조 등의 국사가 수행했으며, 그 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공부를 위해 봉정암을 찾았다.

<봉정암 석가모니 뇌사리탑>

워낙 산세가 험하기 때문에 봉정암이 현재의 모습처럼 절의 모양을 갖추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중건에 앞장선 후 고려 명종에 이르러 지눌국사가 다시 재건하였으며, 6.25이전까지 여러 스님들과 불교 신도들이 7차례에 걸쳐 절을 세우는 것을 돕기 위해 모금 활동을 했다.

적멸보궁의 건축적. 미술적 상징과 가치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 그 자체를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기에, 불상이나 탱화 등 그 어떠한 부처를 상징하는 다른 대상은 없다.

대신에 절의 대들보를 구성하는 공포나 벽면의 벽화, 또는 탑 등에서 다른 전각들과는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특히 다른 절들의 건축 형식, 미술 형식보다 더욱 큰 상징을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숨은 상징들을 통해 은유적으로 불교의 가치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불뇌보탑 - 봉정암

이 부분의 본문은 인제 봉정암 오층석탑입니다.

봉정암의 불뇌보탑은 석가모니불, 즉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했다고 전해지는 탑이다.

이 탑에는 다른 불탑과는 달리 별다른 장식이 없다.

5층 중 가장 밑에 연꽃 모양의 문양이 희미하게만 남아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탑의 벽면에 다른 문양이 있고 풍화된 것으로 짐작했으나 어떠한 문양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조각된 문양은 밑 부분의 연꽃이 유일한 것이 밝혀졌다.

불뇌보탑은 특이하게 탑의 기단부를 찾을 수 없다.

탑의 기단부는 원래 탑의 맨 밑층과 지반을 구분하기 위해서 만드는 석조물인데, 불뇌보탑은 상징적으로 중요한 탑임에도 불구하고 기단부가 없다.

이에 대한 해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유력한 것은, 설악산의 장엄한 암석들이 탑의 기단부 역할 즉, 탑을 떠받들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방법이라는 설이다.

기단부를 따로 만들지 않고, 부처의 진신사리에 대한 존경까지를 함께 나타내는 것이다.

불교성지로써의 가치

적멸보궁은 자장율사가 건립한 이래로 종교적 성지로써의 역할을 해왔다.

큰 불교적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행사가 행해졌으며, 주요 선승들과 고승들이 공부를 위해 선택한 장소도 적멸보궁이었기에 자연스레 불법의 전승 장소라는 명맥도 이어 갔다.

이러한 불교 성지로서의 가치가 극에 달한 것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크게 진흥시킨 고려에 이르러서이다.

물론 고려시대에는 적멸보궁뿐만이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일반 민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많은 대중적인 절들이 세워졌지만, 그럴수록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성지로써의 적멸보궁이 가지고 있는 유일함과 특별함은 더욱 빛을 발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가적인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많은 불교 신도들이 탄압 받았고, 적멸보궁 또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결국 임진왜란때, 구국의 기치를 들고, 승병과 의병을 일으킨 중심지가 되었던 것도 적멸보궁의 힘이 크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명대사는 전국의 명산, 명승지, 특히 적멸보궁을 중심적으로 돌아다니며, 승려들의 참여를 촉구하였고, 결국 이러한 노력은 적멸보궁의 선승들이 구국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 임진왜란 당시 통도사의 설화를 하나 살펴보면, 사리를 훔치려던 왜군들이 처음에 함을 열어보니 두꺼비가 사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에 놀라 함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보니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사리를 지키고있어 사리를 가져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 두꺼비와 구렁이는 별다른 특별한 전설이나 설화를 나타낸다기보다는 적멸보궁을 비롯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백성의 마음이 비유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승병들의 궐기로 인해 많은 일반 백성 또한 의병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적멸보궁은 그 명맥을 이어오며, 국난 때에는 민족적 운동의 중심지로써의 역할까지 수행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적멸보궁이 6.25 때 크게 훼손되었는데, 이는 적멸보궁 대부분이 깊은 산 속에 있어, 그대로 놔두면 적군의 결집 장소가 된다고 판단, 없애는 것이 군사작전상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6.25가 끝난 후에 재건과 수리가 계속해서 진행되었고, 현재 적멸보궁은 대한민국 불교 신도들의 성지로써 여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