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절 絶
인생은 무덤에서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다.
정신과 육신의 결합으로 탄생하고 존재하는 인간이 정신 육신이 분리되면 서로가 생명과 삶을 상실하고 허무로 돌아간다.
육신은 흙이 되어 허무로 돌아가고 정신은 대기에 흡수되어 허무로 돌아간다.
그 정신과 육신이 갈라지고 단절되는 상태를 절이라 한다.
절은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무형의 상태다.
무는 공간을 상징한다.
공간은 무형의 기로 가득 차 있다.
그 기는 바로 영혼과 정신의 뿌리다.
비록 육신은 흙이 되어 완전히 소멸되었지만 정신은 공간의 기로서 영생하는 것이다.
그 기는 허공을 맴돌면서 제2 인간으로 부활하려고 재생하는 것이다.
끊어진 곳에서 새로운 싹이 트는 것을 절처봉생이라고 한다.
허공에 뜬 양기가 생명으로 부활하자면 음이라는 육신을 만나야 한다.
육신은 양기와 평생을 같이 사는 유일한 짝이다.
영혼은 짝을 구하기 위해서 하늘을 뱅뱅 맴돈다.
마치 병아리를 찾아 헤매는 솔개처럼 짝을 찾는 것은 미혼의 소년소녀다.
그들은 혼자서 살기보다는 짝을 지어 살고 싶어 짝을 찾는 것이다.
결혼은 독신생활을 청산하고 부부생활을 시작하는 인생의 일대변동이다.
그들은 정열에 넘치고 사랑에 굶주려 있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백지인지라 누가 좋고 나쁜지를 전혀 분간할 수가 없다.
덮어놓고 사랑할 뿐이다.
오직 자기만을 뜨겁게 사랑해 주는 상대를 만나면 무조건 뛰어들고 사랑의 불꽃을 태운다. 그러다가 보다 아름답고 보다 사랑해주는 새사람을 만나면 미련 없이 떠나 새 멋을 즐긴다.
쉽게 끓는 냄비가 쉽게 식는다고 절은 끓기도 잘하지만 식기도 잘한다. 그렇다고 도망치는 절을 붙잡아맬 수는 없다.
절은 무형의 기로서 형체가 없는지라 사랑할 수는 있어도 잡거나 묶을 수는 없다.
12운성 중 음양을 갖추지 않은 것은 오직 절뿐이다.
그는 양의 기는 있어도 음의 형체는 없다.
완전 개방된 자유의 종달새가 바로 절이다.
그래서 절은 개방의 별이라고도 한다.
기는 가볍고 형체는 무겁다.
무게가 가벼운 기는 허공을 훨훨 날아다닐 수 있다. 하지만 기는 정착할 수가 없다.
한곳을 지키고 한 가지를 관철할 수 있는 지구력도 없다.
닥치는 대로 날아다닐 뿐이다. 그래서 절은 변화가 무상하고 지구력이나 참을성이 없다.
새로운 인생으로 부활하는 변화를 추구하듯이 변화라면 덮어놓고 기뻐하고 즐기는 것이 절의 천성이요 본능이다.
그것도 한번만의 변화가 아니다.
열 번 백번의 쉴 새 없는 변화를 즐긴다.
기가 약하면 귀가 가볍고 생각 또한 가볍듯이 절은 몸이 가볍듯이 무척이나 기도 가볍고 귀와 생각과 행동까지도 가볍다.
짝이 없이 나 혼자 만이 살아 무엇이든 자기 하나만을 생각한다. 자기만 기쁘고 즐거우면 그만인 것이다.
남이야 울든 서러워하든 억울하든 내 알 바가 아니다.
갑보다 을이 좋으면 언제든지 미련 없이 바꿔버린다.
같은 또래끼리는 정열은 있으나 아끼고 귀여워하지는 않는다.
절은 오직 자기만을 사랑할 뿐 아니라 아끼고 귀여워해 주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것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만이 가능하다.
절은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과의 사랑을 즐긴다.
항상 안아주고 업어주고 품어주고 다듬어 주어야만 절은 도망치지 않고 따른다.
절은 새로운 인생으로서의 변화를 갈구하지만 아직 변화가 성립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변화가 간절하고 필연적일 뿐이다.
짝을 잃었으니 새 짝을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형체를 잃은 것은 변화의 동기요 원인이다.
절은 변화의 동기이자 시점이다.
어떻게 짝을 만나서 변화하고 부활하느냐는 전혀 미지수다. 하지만 다시 절처봉생하고 부활하며 변화하는 것만은 필연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런 점에선 묘 다음의 별을 절이라고 한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명명이다.
절은 인생의 시작으로서 반드시 부활만으로 볼 수는 없다.
인생은 생명의 씨앗인 남자의 정충에서 비롯된다.
정충은 양의 기로서 무형이지만 생명을 창조하는 씨앗으로서 위대한 창조력을 간직하고 있다.
그 정충은 음인 여자를 얻음으로서 방사될 수 있다.
정충을 받아들이는 여자의 기능을 포(胞)라고 한다.
포는 애기 보이자 태보로서 잉태하는 기능을 말한다.
절은 바로 그 포가 문을 열고 정충을 맞이하려는 과정이자 아직 미혼인 남성(정충)과 여성(포)이 짝을 찾고 구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고르고 시험하며 저울질하고 또 골라 헤매는 것이다.
동물도 때가 되면 태기가 동하고 짝을 찾는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태기가 바로 절이요 포인 것이다.
태기는 잉태의 기운이자 남성의 정충인 양기를 의미한다.
태기인 포와 정충은 다 같이 때가 되면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발동한다.
태기가 동하면 발광을 한다. 하지만 태기는 잉태의 동기요 갈구일 뿐 잉태가 성립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여자 태기와 남자 정충으로 비로소 잉태가 성립된다.
아무리 태기가 동한다 해도 정충을 얻지 못하면 임신할 수가 없듯이 아무리 부부생활을 해도 태기가 동하지 않으면 임신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태기와 정충의 결합으로써 창조되는 것이 현실이요 진실이다.
그 인생의 씨앗이자 출발인 태기와 정충이 세상이치를 알고 사물을 분별할 수는 없다.
어리고 연약하며 순진 난만한 정기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하얀 백지가 가볍게 동하고 응하며 분별 없이 행동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아기가 백지에 이것도 그리고 저것도 그리고 싶어하는 것과 똑같다.
만일에 절이 인생의 부활이라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진다.
홀로된 영혼은 백년을 살아온 늙은 여우로서 세상이치를 너무도 환히 잘 알뿐더러 만사에 능소능대한 노련한 귀신이다.
그 늙은 여우가 부활을 하는데 이것저것 분별 없이 닥치는 대로 부딪치고 사랑하며 가뜩이나 늙은 자신이 자신보다 월등히 나이 많은 어른을 택할 수는 없다.
늙은 여우는 교활하고 간사해 가장 실속 있고 알찬 상대를 타산적으로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절은 부활 아닌 신생이요 창조의 시발인지라 단순하고 앳되며 지나치게 순진하고 담백하다.
사주의 뿌리에 절을 타고난 사람은 갓난아기처럼 순진하고 담백하며 귀가 가볍고 변화를 즐긴다.
지구력이 없어서 권태를 쉽게 느끼고 자기만을 아끼고 사랑하며 귀여워하면 덮어놓고 따르고 즐기며 홀딱 빠진다.
무엇이든 한 가지를 일관하는 것은 질색이다.
책을 읽어도 한두 장 읽으면 딴것으로 바꾸고 음식 또한 반찬을 이것저것 바꿔야 한다.
사랑을 하는데도 짝을 자주 바꾸려한다.
권태가 심해 오래 끄는 것은 어렵다.
평생을 통해서 거구영신과 신지대사를 계속 추구하고 즐기는 변덕 많은 인생이 바로 절의 주인공이다.
1) [성격]
권모술수를 쓸 줄 모르는 지극히 숨김없는 호인형이다.
한가지 일을 꾸준히 일관되게 해내기는 어렵다.
안정됨과 침착함이 없어 좀 어수선하고 부산하다.
인성이 좋아 남을 의심할 줄 몰라 남의 말을 믿어 기만을 당하거나 감언이설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워서 여성은 일찍 성관계를 경험하기도 한다.
아랫사람을 잘 보살펴주지만 아랫사람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은 어렵다.
2) [자리]
년주 절 : 보모와 일찍 헤어진다.
월주 절 : 형제간에 어려움이 많고 매사에 손재수다.
일주 절 : 호색으로 피패 해지고 남에게 잘 이용당한다.
시주 절 : 자녀와 인연이 박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