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부-18
국도(國都)
1) 개경
이곳은 전 왕조의 수도로서 일차적으로 수도의 물망에 올랐다.
한반도의 중앙부를 차지하며, 예성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江華 북안에 연접 있는 지역이다.
백두산의 영기가 간백산(間白山) 북포태산(北胞胎山) 남포태산 등 마천령산맥을 거쳐 두류산(頭流山)에서 함경산맥을 만나고, 낭림산맥을 지나 원산 서쪽 마식령 산맥에서 남서향하여 임진강 상류에까지 연결되는 형태이다. 개경 부근에 이르러서는 산세의 험준함은 없는 편이고, 대체로 저산성의 구릉지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저산성이기는 하지만 주위가 거의 모두 산지로 되어 분지상(盆地狀)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규국(規局)은 넓지 못한 편이다. 왕궁의 소재지인 만월대(滿月臺)를 중심으로 북쪽 5리에 개경의 진산인 부소(扶蘇) 또는 곡령(鵠嶺)이라 하는 송악산(松岳山, 588m), 그 북쪽으로 천마산(天磨山) 성거산(聖居山) 그리고 국사봉(國師峰, 764m)이 있는데, 천마산과 국사봉이 마주하고 있는 계곡 사이에는 부성(副城)으로서 대흥산성(大興山城)이 축조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일출봉과 남산, 서쪽으로는 월출봉과 봉명산, 남쪽으로는 외성터인 용수산, 진봉산, 광덕산, 장산 등 해안 지대로서는 상대적으로 험준하다고 볼 수 있는 산세가 둘러싸고 있어, 오관산(五冠山)의 정기를 축적할 수 있는 풍수상 전형적인 장풍국(藏風局)이다.
오관산이 개경 정기의 진원지임은 [택리지]에도 명백히 지적되어 있다.
이 산은 도선이 말한 수모목간(水母木幹)의 형세로 산세가 극히 길고 심원하며 대단(大斷)하여 송악이 되었는데, 주천(湊天)의 토성(土星)이다.
기세가 웅건(雄健), 박대(博大)하고, 의사가 포축(包畜), 혼후(渾厚)하다. 동서로 강이 있고, 남쪽 바다로는 강화와 교동 두 큰 섬이 가로막고 있으며, 북으로 한강의 물을 가두어 은연중 하류는 앞산의 바깥을 둘러싸서 깊고 넓다. 풍기(風氣)가 평양에 비하여 더욱 짜임새 있고 견고하며, 박연(朴淵) 화담(花潭) 등 주위 경관이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장풍에 따라 주변 산세가 조밀하여 국면이 관광(寬廣)하지 못하고, 북쪽 산 여러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계류수는 모두 중앙에 모이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수세가 거칠고 분류가 급격하여 순조롭지 못한 결점이 있다.
이와 같은 역세(逆勢)의 수덕(水德)을 진압하고, 지덕(地德)을 비보(裨補)하기 위하여 도선의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을 응용하여, 계류의 합류점과 내수구(內水口)에 사찰을 건립하였다.
하천의 범람이 우려되는 취약지점과 합류점에 사원을 건립함으로써 인공 건조물에 의한 하천의 측방 침식을 억제하고, 승려들로 하여금 하천을 감시하게 하는 동시에, 유사시 그들의 노동력으로 대처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다.
2) 한양 모악
한양은 오늘날 서울의 사대문 안쪽이고, 모악은 신촌 서강 일대이다.
모악은 하륜(河崙)이 거의 독단적으로 주장하였던 땅으로 나라의 중앙에 있어 교통도 편하고 수리의 이점도 있으나, 불행히 한 동네에 위치하여 궁전과 종묘를 넓게 잡을 수 없으며, 명당 좌처(坐處)가 협착하고 주산이 저미(低微)하여 겨울철 한랭한 북서 계절풍을 막기 어렵고, 수구(水口)가 관쇄(關鎖)하지 못하여 한양에 비길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개경과 한양은 거시적 안목에서 보자면 매우 비슷할 수도 있지만 국토의 통할이라는 측면에서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특히, 추가령 지구대를 이용하여 함경도지방과의 유통을 꾀하는 데 있어서는 한양의 입지가 개경보다 월등한 편이다.
또한 규국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한양이 탁월하다.
한양은 풍수상 장풍과 득수를 고루 갖춘 전형적인 풍수 명당의 지세이다.
현무인 주산은 북악산이 되고 청룡은 낙산(駱山), 백호는 인왕산이며, 주작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안산은 남산, 조산은 관악산이다.
외수(外水)인 객수(客水)는 한강인데, 안산과 조산 사이를 빠져 흐르며 명당을 크게 감싸 안고 있는 형세를 취한다.
內水인 명당수는 청계천인데, 객수인 한강과 명당수인 청계천은 그 흐름의 방향을 반대로 하는 내외수류역세(內外水流逆勢)의 형국이다.
청계천이 동쪽으로 도성을 관통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는 데 대하여, 한강은 서진(西進)하기 때문에 명당수와 객수는 완연히 역세의 국면을 가지게 된다.
한강은 서울 부근에서 한양을 북으로 감싸듯 돌며, 서울 남쪽을 지나 북서진하는 대규모의 곡류하천 형태를 취한다.
현재의 동작․영등포․노량진․강서구 일대가 곡류하천의 공격면이 되고, 용산․서빙고 쪽이 포인트바 면을 이루기 때문에 한강이 범람하는 경우에도 포인트바 쪽인 도성 안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그에 겹쳐 내외 수류가 역세이므로 심한 범람이 일어나는 경우라 할지라도 도성 안이 침수되는 것을 방지하여 주고 있다.
청계천은 포인트바 쪽인 뚝섬에서 한강에 합류하기 때문에 홍수 발생시 도성 안의 하수와 지표수를 쉽게 배수할 수 있는 이점을 갖는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연결시켜 주는 부분인 한양의 건방(乾方:북서쪽)이 허결(虛缺)하여 황천살(黃泉煞)로 볼 수 있는 단점이 있다.
3) 계룡산 신도안
계룡산 신도안은 크게 보아 한양과 같은 득수국과는 거리가 멀고, 개경과 유사한 장풍국으로 해석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말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자주 표현되는 말이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과 회룡고조(回龍顧祖)라는 것인데, 이는 모두 계룡산과 그 주위 산천의 형세를 가지고 말하는 일종의 형국론적 술어이다.
산태극과 회룡고 조란 같은 형세에 대한 이중표현으로, 진안의 마이산․덕유산의 맥이 무주 영동 대전 동부 회덕을 거쳐 공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공주군 계룡면과 반포면의 경계를 따라 이어져 태극 모양을 이룬다는 것으로, 용세가 머리를 돌려 근원을 돌아보는 고조(顧祖)의 형세라는 관점이다.
수류(水流) 역시 금강의 줄기가 장수 진안 무주 영동 대전, 동부 부강 공주 부여 강경을 거쳐 장항과 군산 사이로 빠지는 동시에, 용추골 용동리의 명당수가 청룡의 뒤를 돌아 크게 우회하여 금강에 합류하는 거대한 태극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수태극이 된다는 것이다.
이곳은 호순신(胡舜申)의 [지리신법 地理新法]에서 제시된 것처럼, 수파가 장생 방위라 반드시 망할 땅(水破長生 衰敗立至)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뿐 아니라, 제신(諸臣)의 반대론에서 명백히 제시된 바와 같이 위치가 남방에 치우쳐 동, 서, 북 삼면과 떨어져 도리의 균형을 얻지 못한 곳이다.
가까운 곳에 큰 하천이 없어 조운(漕運)과 용수(用水)가 불편하며, 해안으로부터의 거리가 멀어 그에 따른 불편함이 상당함은 물론, 둘레가 지금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계룡산 연맥에 의하여 깊게 둘러싸인 일종의 좁은 산곡 분지상 지세이기 때문에 국도로서는 개경이나 한양에 비길 바가 못 된다.
국사(國師), 왕사(王師), 제사
한나라의 정신적 지도자 명칭으로 황제 국왕이 명한 직책을 받은 스님.
국사당(國祀堂)
1)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한양의 수호신사(守護神祠)로 북악신사 (北岳神祠)와 함께 남산 꼭대기에 두었던 목멱신사(木覓神祠)의 사당.
2) 國祀堂이라고도 쓰며 후에 무당(巫堂)으로 변하여 일반의 기도장으로 사용되었다.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을 때 건물을 헐어 편액(扁額)과 사당의 일부를 인왕산으로 옮겼다.
현재 그 자리에는 남산 팔각정이 있다.
3) 국사당에 보관된 원형의 무구 7점으로 명두(明斗)라고도 한다.
국사당은 무속신앙에서 신을 모신 집으로 굿판을 벌이기 쉽도록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건립된 굿 당에 속한다.
이 건물 내부의 무속신 그림 사이에 함께 걸려 있다.
명도(明圖)는 무녀를 계승할 때 넘겨주는 증표이다.
큰무당이 자기의 대를 물려줄 사람을 선정하여 그 상징물로 명도를 물려주고, 이것을 받은 무녀는 자기의 수호신처럼 귀하게 여기고 위하게 된다.
지역별로 명도라 불려지는 물건은 다르지만 중․북부 지방에서 의미하는 명도는 놋쇠로
만들어진 것으로 앞면은 밥그릇 뚜껑처럼 약간 불룩하고, 뒷면에는 작게 해 와 달, 별, 글자 등을 도드라지게 하였다.
국사당(國師堂)
무속용어.
최초로는 남산(목멱산)신령과 이성계가 장군 때 실수로 죽인 처녀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공민왕, 무학, 나옹, 서역승 지고, 맹인 등을 모셨다고 한다.
국사당 무신도(國師堂 巫神圖)
국사당의 무신도(國師堂의 巫神圖)는 국사당 제당 내 전면에 신상(神像) 10점이 걸려 있고 왼쪽 벽에 5점의 신상이, 오른쪽 벽에 3점의 신상이 있다.
모두 18점의 신상이 걸려 있으며, 신당 양쪽 방에 각각 4, 6점의 신상이 보관되어 있으며, 모두 28점이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그 중 12점은 조선 인조 때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16점은 고종 때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추정할 뿐이다. 모두 비단 바탕에 채색한 것이다.
전면 오른쪽 벽에 걸린 순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나옹님은 가로 63cm, 세로 106cm의 여래좌상 형태 연화좌 위에 앉아 있으며 머리 뒤에는 광배 같은 것이 나타나 있다.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고승이다.
2) 삼불제석님은 가로 57cm, 세로 104cm로 모두 흰색 고깔을 쓰고 있으며 목에 긴 염주를 걸고 있다.
제석은 산신(産神)․수신(壽神)․농신(農神)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무속과 불교가 접합된 결과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 무학대사는 가로 59cm, 세로 104cm로 머리에 흰 고깔을 쓰고 흰색 도포에 청색과 보라색 끝의 단이 달린 옷을 입고 있으며 양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다.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다.
4) 이태조는 가로 60cm, 세로 104cm로 이성계의 신상은 위아래 두 점이다.
옆에는 가로 32.5cm, 세로 40cm의 이태조 영정이 덧걸려 있다.
오른쪽 태조상은 검은 색 수염에 흰색 바탕에 약간 붉은 색 무늬가 있는 곤룡포를 입었으며 왼쪽에 있는 또 다른 태조상은 붉은색 곤룡포에 황색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있다.
5) 강씨 부인은 가로 60cm, 세로 104cm로 앞이 막힌 청색 웃옷에 홍치마를 입고 팔을 옷소매에 넣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6) 호구아씨는 가로 62cm, 세로 100cm로 젊은 여신인 두신(痘神) 천연두(손님, 홍역신)가 신격화된 것으로 아씨의 형상을 하고 있다.
주황색 옷에 쌍학문이 있는 허리띠를 두르고 있다.
이 신상은 1929년에 원본이 소실되어 다시 그린 것이다.
7) 최영 장군은 가로 65cm, 세로 110cm로 최일 장군이라고도 부르며, 붉은색 관복에 투구를 쓰고 검은 수염이 나 있으며 오른손에는 청룡언월도를 쥐고 있다.
개성 덕물산의 주신으로 무당이 가장 중시하는 신이다.
8) 별상님은 가로 57cm, 세로 101cm의 마마신으로 장수의 모습을 나타낸다.
전립에 검은색 군복을 입고 왼쪽 옆구리에 칼을 차고 있다.
군웅대신 또는 최영장군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이 신격(神格)은 무당들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9) 산신은 가로 60cm, 세로 105cm로 기호노인상(騎虎老人像) 뒤에 선도(仙桃)를 든 동자가 서 있다.
10) 민중전은 가로 72cm, 세로 110cm로 원삼에 족두리 차림과 두 동녀(童女)를 배치한 것은 호구아씨상과 비슷하다.
11) 용궁님은 가로 59cm, 세로 102cm로 파도무늬 위에 기룡남신상(騎龍男神像)이 그려져 있다.
12) 단군은 소액자(32×24cm)에 단군천신(檀君天神)이라는 글자가 있다
13) 곽선생은 가로 57cm, 세로 93cm로 청색 도포를 입었으며 당달봉사님, 곧 맹인상이라고 한다.
역수에 능했던 중국 동진(東晋)의 곽박(郭璞)의 와음(訛音)으로 보인다.
14) 창부씨는 가로 57cm, 세로 93cm 무속에서 일종의 광대신으로 하위 신에 속하며 예능신으로 보이며 굿에는 액을 막아주는 신으로 섬겨진다.
흰색바지에 누른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국사당의 무신도(巫神圖) 가운데 비단바탕에 채색한 그림들은 수준 높은 그림들이다.
이들 그림은 무속(巫俗)의 복합적이고 풍부한 신 관념을 구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하겠다.
국사당(仁王山國師堂) 인왕산
인왕산 국사당(仁王山國師堂)은 무속신당(巫俗神堂)으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無學大師), 그리고 여러 호신신장(護身神將)을 모시고 있으며, 특히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국사당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맞배지붕의 한옥이 남아 있다.
원래 이 당은 남산 꼭대기 곧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년(1396)에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태종 4년에는 호국의 신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도 불렀다.
이 당은 1925년에 남산에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저들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국사당이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와 무학대사가 그곳에서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다고 하며, 당의 전면 3칸에 왼쪽에 한 칸이 붙어 있었으나 뒤에 오른쪽 한 칸을 붙였다.
따라서 전면은 약 20여m이고 측면은 9m정도의 크기이다.
기둥 칸살은 전면 어간(御間) 2.6m에 협간(夾間)과 측간(側間)은 모두 2.4m로 내부 넓이는 모두 11평이고 바닥은 마루이다. 또 마루 좌우에는 온돌방이 있는데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마루 전면과 좌우 일부에는 무신도(巫神圖)가 걸려 있고 무신도 앞에는 제상이 있으며 마루는 굿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일반건물보다 단순한 구조이긴 하나 구조는 큰 편이며 집 전체적인 구성은 견실하고 간소하면서도 방주(方柱)의 실귀이나 문살문의 새김 등과 같은 세밀한 부분에서는 최소한의 세련미가 가해져서 우아한 면도 엿보인다.
또 대들보의 후림이나 서까래의 배흘림, 규격 설정 등에서 경공(京工)의 솜씨를 엿볼 수 있어서, 영조(英祖)․정조(正祖) 이래의 견실과 간결을 위주로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국사당은 굿만 하는 곳이 아니라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드린다.
참배 객은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방에서도 찾아오는데, 정월에 가장 많이 찾아온다.
당에서 주로 행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病)굿 또는 우환굿 그리고 부모의 사령(死靈)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진오귀굿이다.
그러나 이 당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이 아니고 당주(堂主)가 관리하면서 무당의 요청이 오면 당을 빌려주기 때문에 1년 내내 굿을 하나 하루에 보통 3건, 많을 때는 4~5건을 하는데 특히 3월과 10월이 가장 많고 음력 섣달은 굿이 거의 없는 편이다.
당주는 신령님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를 올리는데 무녀를 초치해서 굿을 한다.
이 당 주위에는 기자암(祈子岩)으로 이름난 禪바위가 있고 암자가 여러 채 있으며 또 일반주택과 격리되어 있어 굿 장소로 적합한 위치에 있다.
따라서 이 국사당은 쇠잔해 가는 서울 무속의 집결처로서 무속신앙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군겁쟁재격(群劫爭財格)
격국(格局)에서 식상과 관성이 없고 재성만 극을 받을 때. 또한 일인군주격(一人君主格)이라고 한다.
군위신강(君爲臣綱)
삼강(三綱)의 하나. 군위신강: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군웅(軍雄)
무속용어.
군의 병졸이라도 군인이 죽었으면 군웅(軍雄)이라고 한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나쁜 액과 나쁜 수를 물리치고 막아주는 신을 말한다.
군웅(群雄, 軍雄)
군웅(群雄,軍雄) 또는 군웅신은 한국의 무속신의 하나로, 장군신의 일종이다.
원래 군웅이란 여러 명 즉 뭇 영웅을 나타내는 장군신의 하나였다.
군인의 신분으로 죽은 사람, 전쟁터에서 혹은 사고 등으로 피 흘리고 죽은 사람, 비명횡사한 사람, 무신으로 무예와 병서에 능통했던 인물들을 군웅이라고 한다.
군웅신은 제왕신이나 장군신, 산신 등을 보좌하는 신으로 관리와 감독의 역할, 액운과 액살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왔다.
언제부터 군이란 글자의 한자를 군사 군(軍)자로도 병용 사용하게 되기도 했다.
상산별군웅 신과 억사별군웅 신은 최영 장군신을 보좌하는 부관, 수행원 들이다.
산신군웅과 성조신군웅은 산신과 성조신을 보좌하는 군웅이고, 사살군웅은 악령과 살을 퇴치하는 신으로 이름 없이 죽어간 군인의 신이다.
사신군웅은 외교사절로 오고 가던 외교관 혹은 수행 군인의 신이다.
군탄(涒灘)
지지(地支) 이아(爾雅)의 하나인 申를 말함.
군탄은 크게 다E는 것이니 만물이 모두 그 정기(精氣)를 닦는 것이다.
굴곡래용
主山 청룡 백호의 보국형세(保局形勢) 래용(來龍)의 굴곡변화를 나타낸 모양을 평면이다.
래용이 길고 짧음을 논하지 말고 다만 한 마디의 굴곡 기복(起伏) 변화 활동을 잘 관찰해야 한다.
또한 입수취기(入首聚氣)가 있는지 없는지 자세히 보아야 한다.
입수취기와 래용의 굴곡기복 보룡변화 활동은 보국형성의 조화가 서기광채나며 양명하게 되며 명당 명혈(明穴)이 결혈(結穴)하게 된다.
입수취기(入首聚氣) 좋으면 모든 자손(子孫)에게 발복하나 특별히 장자(長子)가 부귀권세한다.
입수취기가 서기광채(瑞氣光彩) 나서 양명(陽明)하면 장자가 부귀권세한다.
입수취기(入首聚氣)가 生氣가 없는 혈은 중소자손(中小子孫)이 부(富) 하나 권세는 못한다.
양명(陽明)은 귀(貴)로 보고 서기광채는 권세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