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백과사전-ㄱ부

역학사전-ㄱ-15

유프랭크지안 2017. 7. 16. 14:24

ㄱ부-15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관세음 보살은 光世音, 또는 觀自在 보살이라고도 하나,

중생의 모든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그 괴로움을 없애준다는 뜻에서 觀世音이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인도 범어로 아발로키데스바라(Avalokitesvara)라는 말을 번역한 말.

관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관한다는 말로 이 세상 모든 중생의 온갖 고뇌의 소리를 다 들으시고 관찰하여 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을 받들고 계신 분으로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無畏心)을 베풀어주는 분이라 하여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도 하고 대자대비를 본원력으로 하시는 분이기에 대비성자(大悲聖者)라고도 한다.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을 대세지보살이나 지장보살과 함께 협시하는 경우가 가장 많고 그 외에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로서도 표현된다.

손에는 甘露水의 정병(淨甁)을 지니는 것이 보통이며, 정병 대신 연꽃을 잡는 경우도 있다.

머리의 보관 중앙에는 반드시 아미타불의 화신, 즉 화불(化佛)을 좌상 또는 입상으로 나타낸다.

이외에 백의관음(白衣觀音) 양류관음(楊柳觀音) 수월관음(水月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성관음(聖觀音) 33관음(三十三觀音)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준제관음(準提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등 다양한 관음이 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각 중생의 수준에 알맞은 모습으로 변해서 제도(普門示現, 보문시현)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관음보살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33응신

불가에서 말하는 관음보살님은 한 분이 아니고 모두 33분이다.

33분의 관음은 그 형태와 모습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며, 맡은바 소임이 다 다르

다.

양류관음. 용두관음. 지경관음. 원광관음. 유희관음. 백의관음. 연와관음. 농견관음. 시약관음. 어람관음. 덕왕관음. 수월관음. 일엽관음. 청경관음. 위덕관음. 연명관음. 중보관음. 암호관음. 능정관음. 아뇩관음. 엽의관음. 유리관음. 합리관음. 육시관음. 보비관음. 합장관음. 일여관음. 불이관음. 지련관음. 새수관음. 아마뎨관음. 다라존관음. 마랑부관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사십이수진언(四十二數眞言)

1) 관세음보살여의주수진언, 여러 가지 보배 재물을 얻는 진언이다.

[옴 바아리 바다리 훔 바탁]

2) 관세음보살견색수진언, 여러 가지 불안에서 평안을 얻는 진언이다.

[옴 기리나라 모나라 훔 바탁]

3) 관세음보살보발수진언, 뱃속에 모든 병고를 없애는 진언이다.

[옴 기리기리 바아라 훔 바탁]

4) 관세음보살보검수진언, 일체 도깨비 귀신을 항복 받는 진언이다.

[옴 제세제야 도미니 도제 삿다야 훔 바탁]

5) 관세음보살바아라수진언, 일체 천마외도를 항복 받는 진언이다.

[옴 이베이베 이야 마하 시리예 사바하]

6) 관세음보살금강저수진언, 일체 원적을 꺽어 없애는 진언이다.

[옴 바아라 아니바라 닙다야 사바하]

7) 관세음보살시무외수진언, 일체 처에 두려움이 있어 안온함을 구하는 진언이다.

[옴 아라나야 훔 바탁]

8) 관세음보살일정마니수진언, 눈이 어두워 광명을 구하는 진언이다.

[옴 도비가야 도비바라 바리니 사바하]

9) 관세음보살월정마니수진언, 열병으로 청량함을 구하는 진언이다.

[옴 소싯지 아리 사바하]

10) 관세음보살보궁수진언, 영화스러운 벼슬을 구하는 진언이다.

[옴 아자미례 사바하]

11) 관세음보살보전수진언, 좋은 친구를 사귀는 진언이다.

[옴 가마라 사바하]

12) 관세음보살양류지수진언, 여러 가지 병을 없애는 진언이다.

[옴 소싯지 가리바리 다남타 목다에 바아라 바아라 반다 하나하나 훔 바탁]

13) 관세음보살백불수진언, 일체 악한 장난을 소멸하는 진언이다.

[옴 바나미니 바아바제 모하야 아아 모하니 사바하]

14) 관세음보살보병수진언, 모든 권속이 화합하는 진언이다.

[옴 아례 삼만염 사바하]

15) 관세음보살방패수진언, 일체 사악한 짐승을 물리치는 진언이다.

[옴 약삼나나야 전나라 다노 발야 바사바사 사바하]

16) 관세음보살월부수진언, 관재가 없게 하는 진언이다.

[옴 미라야 미라야 사바하]

17) 관세음보살옥환수진언, 아들과 딸, 심부름꾼을 얻으려는 진언이다.

[옴 바나맘 미라야 사바하]

18) 관세음보살백련화수진언, 여러 가지 공덕을 성취하려는 진언이다.

[옴 바아라 미라야 사바하]

19) 관세음보살청련화수진언, 시방세계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진언이다.

[옴 기리기리 바아라 불반다 훔 바탁]

20) 관세음보살보경수진언, 커다란 지혜를 얻는 진언이다.

[옴 미보라 나락사 바아라 만다라 훔 바탁]

21) 관세음보살자련화수진언,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 알현하는 진언이다.

[옴 사라사라 바아라 가라 훔 바탁]

22) 관세음보살보협수진언, 땅속에 모든 보물을 얻는 진언이다.

[옴 바아라 바사가리 아나맘나훔]

23) 관세음보살오색운수진언, 신선의 도를 얻는 진언이다.

[옴 바아라 가리라타 맘타]

24) 관세음보살군지수진언, 범천에 나기를 구하는 진언이다.

[옴 바아라 서가로타 맘타]

25) 관세음보살홍련화수진언, 제천궁에 나기를 구하는 진언이다.

[옴 상아례 사바하]

26) 관세음보살보극수진언, 타방으로부터 오는 역적과 원수를 물리치는 진언이다.

[옴 삼매야 기니하리 훔 바탁]

27) 관세음보살보라수진언, 일체 제천선신을 불러보려면 진언을 외운다.

[옴 상아례 마하 삼만염 사바하]

28) 관세음보살촉루장수진언, 일체 귀신을 심부름시켜 어김이 없고자 하는 진언.

[옴 도나 바아라 학]

29) 관세음보살수주수진언, 시방에 계신 부처님의 가피를 얻는 진언이다.

[나모라 다나다라야야 옴 아나바제 미아예 싯디싯달제 사바하]

30) 관세음보살보탁수진언, 일체 미묘한 범음을 성취하는 진언이다.

[나모 바나맘 바나예 옴 아미리 담암베 시리예 시리탐리니 사바하]

31) 관세음보살보인수진언, 구변과 언사의 교묘함을 구하는 진언이다.

[옴 바아라녜 담아예 사바하]

32) 관세음보살구시철구수진언, 선신과 용왕이 와 옹호함을 구하는 진언.

[옴 아가로 다라가라 미사예 나모 사바하]

33) 관세음보살석장수진언, 자비심으로 일체 중생을 덮어주는 진언이다.

[옴날지 날지 날타바지 날제 나야바니 훔 바탁]

34) 관세음보살합장수진언, 귀신과 용과 뱀 호랑이 사자와 인비인의 공경함을 구하려면 이 진언을 외운다.

[옴 바나만 아링하리]

35) 관세음보살화불수진언, 나는 곳마다 부처님 곁을 여의지 않으려거든 이 진언을 외운다.

[옴 전나라 바맘타 이가리 나기리 나기니 훔 바탁]

36) 관세음보살화궁전수진언, 항상 부처님 궁전에 있고 다시 인간의 몸을 받지 않는 진언이다.

[옴 미사라 미사라 훔 바탁]

37) 관세음보살보경수진언, 많이 듣고 널리 배우려면 이 진언을 외운다.

[옴 아하라 살바미냐 다라 바니데 사바하]

38) 관세음보살불퇴금륜수진언, 이 몸으로 부처님 되기까지 보리심을 잃지 않으려면 이 진언을 외운다.

[옴 서나미자 사바하]

39) 관세음보살정상화불수진언, 시방부처님이 속히 와서 마정수기 하심을 구하는 진언이다.

[옴 바아라니 바아람예 사바하]

40) 관세음보살포도수진언, 곡식과 과실이 풍성함을 원하는 진언이다.

[옴 아마라 검제이니 사바하]

41) 관세음보살감로수진언, 일체 중생의 청량함을 얻는 진언이다.

[옴 소로소로 바라소로 바라소로 소로소로야 사바하]

42) 관세음보살총섭천비수진언, 삼천대천세계 마군을 항복받는 진언이다.

[다냐타 바로기제 새바라야 살바도따 오하야미 사바하]

관쇄(關鎖)

靑龍과 白虎의 끝 부분이 左右에서 서로 끝 부분을 맞잡거나 한쪽이 다른 쪽을 감싸 안아 빗장걸이를 한 것처럼 엇갈려 겹쳐있는 모습을 말한다.

관습경(串習境)

관습경(串習境)은 이미 만났던 적이 있는 대상 또는 예전에 익힌 대상을 말하며, 유식학에서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관습경을 만날 때만 염(念, 기억, smrti, 별경심소에 속함)의 마음작용이 그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상응하여 함께 일어난다고 본다.

증습경(曾習境)이라고도 한다.

관액(官厄)

관재의 다른 말.

관우(關羽)

관우(關羽, 160년~219년12)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이다.

본래 장생(長生)이라는 자를 썼으나, 나중에 운장(雲長)으로 바꿨다.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그의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힌다. 의리(義理)의 화신(化身)으로 민담이나 민간전승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神格化)되어 관제묘(關帝墓)가 세워졌다.

관우는 중국인들이 숭배(崇拜)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관우(關羽)가 신(神)으로 추대(推戴)된 이후,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관우와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피휘(避諱)를 하였다.

1) 생애, 초반정사 삼국지(正史 三國志)에는 관우의 탄생과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전장군관장목후조묘비명前將軍關壯穆侯祖墓碑銘]과 [사전비기祀田碑記]․[관공연보關公年譜]․[관제지關帝志]등의 기록들과 민간(民間)에 전하는 여러 가지 설들을 종합하자면, 그는 대체로 환제(桓帝) 연희(延熹) 3년(160년6월24일)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2) 관우(관공)의 가정 구성원에 대한 기록은 정사 삼국지에는 거의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중국 지방지, 민간전설에 근거해서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관우의 조부(할아버지)는 관심(關審)이며 자는 문지(問之), 호는 반석(磐石)이다.

90년(후한 화제 영원 2년 경인년)생으로 해주 상평촌 보지리(解州 常平村 寶池里)에 거주했으며 항상 [역易], [춘추春秋]등의 책을 자식에게 가르쳤다.

157년(후한 환제 영수 2년 정유년)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관우의 부친은 관의(關毅) 자는 도원(道遠)이며 아버지 관심이 세상을 떠나자 부친의 묘소에서 3년 상을 치렀다.

관의의 3년 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60년(후한 환제 연희 3년 경자년) 6월 24일에 드디어 그의 아들 관우가 태어났다.

관우는 성장하여 호씨(胡氏)와 혼인하였고 178년(영제 광화 원년 무오년) 5월13일에 그의 첫 아들

관평(關平)을 얻었다. 관우는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張飛)와 함께 찾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는 언제나 관우와 장비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정이 형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관우는 하루 종일 유비 곁에서 호위를 맡고, 유비를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키가 9척(1척약23cm, 9척207cm), 수염 길이가 2자(약60cm)이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로 묘사된다.

3) 전투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했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袁紹)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과 재량권을 줘서는 안 된다.” 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 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릴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황제)에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쫓지 말거라” 라고 타이르며 그(관우)를 조용히 보내

주었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며,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조 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관우는 여포가 소지하고 있던 적토마를 조조에게서 물려받았다.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안량을 토벌하고 유비의 편지를 받자, 조조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4) 관우는 유비와 다시 만나 형주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지한다.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 평정에 착수하자,

관우는 수백 척의 군선을 모아 하구로 향해 오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해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다.

정사에서는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촉한의 인물들이 적벽대전에서 한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적벽대전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 역시 황개(黃蓋)와 한당(韓當)이며 관우와 장비 등은 아니다.

조조가 적벽에서 패주할 당시 조조가 잃은 병선은 모두 형주의 병선이었으며, 조조가 잃은 병사도 항복한 유종의 수 만 병력이었다.

즉, 지나치게 거대해진 조조의 세력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려면 패주하는 조조의 육군을 포착해 섬멸해야 했으나, 퇴각로로 사용된 화용도를 적벽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에 조비가 길을 닦아놓았기 때문에, 조조의 청주병은 거의 피해를 받지 않고 양양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적벽대전 종결 후 주유는 강릉으로 쳐들어가 강릉을 함락시키게 되고, 강릉을 수비하던 조인은 양양으로 퇴각하고 만다.

세상의 원칙상으로는 2만의 병력을 동원한 손권보다 3만의 병력을 동원했던 유비쪽에 형주의 소유권이 넘어가야 했지만, 주유가 강릉을 차고 들어앉아 그의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던 '양주, 형주, 교주, 익주, 서량을 병합한 천하이분지계'를 실행시키려 한다.

즉, 애초에 주유는 머릿속에 유비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적벽대전 후의 상황에 대해 유비와 손권사이의 확실한 논의가 없었던 탓이다.

주유의 이러한 행동에 의해 갈등이 생기게 되었으며, 상심한 유비는 마량의 헌책을 받아들여, 대신 형주 남부의 4군을 점령하여 수중에 넣게 된다. 때마침 병이 깊어진 주유가 병사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반유비파의 수장이었던 주유가 죽을 때, 후일을 맡긴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친유비파의 거두인 노숙이었다. 이는 주유가 자신의 살아생전에는 반유비정책이 이롭다고 판단하였고, 병이 깊어져서 사망한 후에는 자신만큼 전술을 운용하는 인물이 없다는 판단 하에, 내실을 확고히 다지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친유 비파의 노숙을 후임자로 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노숙은 주유의 후임으로 선택되어 형주병을 그대로 넘겨 받았으며, 오나라의 부족한 인구로는 형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 손권에게 형주를 유비에게 맡기고 장강 이남의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정책을 변경한다.

5)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龐統)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고, 3만의 군사로만 형주를 지키겠다고 하였다.

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은 여몽(呂蒙)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고,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한다.

관우와 노숙(魯肅)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는 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

서량의 마초(馬超)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髥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줬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신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고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고 한다.

6) 말년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于禁)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조조는 관우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허도를 떠나서 낙양(落陽)으로 천도할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지만, 사마의(司馬懿)와 장제(蔣濟) 등이 손권의 군사를 이용하자는 건의를 듣고 실행하지 않았다.

한편 손권은 아들을 관우의 딸과 혼인시키려 해서 사신으로 제갈량의 친형인 제갈근(諸葛瑾)을 관우에게 보냈지만, 관우는 허락하지 않았고 사신으로 온 제갈근에게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겠느냐는 욕설과 협박을 하는 등의 무례함을 범하였다.

관우의 번성 포위 작전 때 손권의 지원군의 도착이 늦자, 손권을 오소리에 비유하며 모욕하였기에 손권은 관우를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다.

관우의 무례함이 극에 달하는 행동으로 인해 분개하던 손권은 조조와의 요청을 수락하고, 관우에게 기습을 감행하여 강릉을 점령하였다. 이 때 관우는 번성을 지키고 있던 조인의 군대를 상대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과 겨뤄 패하고 도망쳤다.

손권은 서황에게 패해 도망치던 관우를 공격하였고, 결국 여몽(呂蒙)의 계략으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關平)을 사로잡아서 건업으로 끌고 온 뒤 참수했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 전투를 야기 시켰으며, 유비와 장비의 죽음에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관우를 장무후(張繆候)로 봉하고, 아들인 관흥(關興)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劉禪)이 등애(鄧艾)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이(關彛) 등 관흥의 후손들은 이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龐會)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중진(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 전쟁에서 인민군의 편이 되어 참전했다.

사실 관평의 후손들이 관우와 관평이 포로로 잡힌 후 참수된 이후에도 형주지역에서 계속 살아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관중진이였던 것이다.

7) 삼국지연의에서의 관우나관중 저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 3인이 도원결의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묘사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는 태사자가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자 유비와 같이 태사자의 요청에 따라 공융을 구출하러 가서 관해와 90여 합의 일기토 끝에 관해를 사살하고 공융을 구출한다고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비가 직접 출동한 것은 아니고 유비가 태사자에게 정병 3천명을 빌려줘서 보내자 이 소식을 들은 관해가 포위를 풀고 도망친 것이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관우는 공손찬 휘하의 병졸로 참전해 조조(曹操)의 허락을 받아 화웅(華雄)을 죽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고, 실제로 화웅은 전력을 추스리고 양인으로 출진한 손견(孫堅)에게 죽임을 당했다.

또한 관도 대전에서 관우는 안량과 함께 원소군의 맹장으로 유명한 문추(文醜)도 죽였다고 하나, 실제로 관우는 안량만 주살 했을 뿐 문추의 경우 치중대를 미끼로 한 순유(荀攸)의 책략에 빠진 문추를 서황(徐晃) 등이 습격하여 없앤 것으로 나와있다. 이 공로로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에게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다.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할 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 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 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 는 3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이 항복을 권유하는 사람으로 나선자가 장료인데, 여포(呂布)를 처형할 때 그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것도 관우였다. 그는 삼국지에서도 관우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에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깊은 유대가 있는 듯이 묘사되고 있다.

관우는 조조의 밑에서 유비에게로 떠나는 도중 도중에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설화가 전해지며, 이것은 나중에 적벽에서 패주한 조조를 놔주는 이유가 된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는 적벽 대전에서 대패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諸葛亮)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 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하도록 한다. 그리고 관우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은 “서약에 따라 목을 치겠다.”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이후 자존심이 센 관우는 제갈량에게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고 하나, 정사엔 화용도에관한 내용이 없다.

연의에서의 제갈량이 취한 강릉과 양양을 공격할 때 사용한 공성의 계는 허구로써, 주유가 차지한 강릉을 유비가 임대 받은 것과 같다.

관우는 방덕과의 대결에서 팔을 크게 다쳐 부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뼈를 긁어내며 치료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으며 바둑을 두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것을 각색한 내용이 나온다.

관우가 방덕(龐德)과의 싸움에서 이 상처를 입었는데, 명의 화타(華陀)가 그의 상처를 살핀다. 그리고 수술 중에는 마량(馬良)과 바둑을 계속 두면서 먹고 마셔 화타를 감탄하게 만든다.

관우가 실제로 이런 치료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 것은 사실이지만 연의에서는 그 의원을 화타로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화타가 아닌 다른 의원이 치료를 해준 것이다.

관우 사망 후 손권의 축하를 받던 여몽에게 관우의 혼이 씌어 여몽이 몸의 일곱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하나, 여몽은 본래 병으로 사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몽은 자신이 전반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자신의 임무 중에 일부를 육손과 공동으로 수행했다. 또한 손권이 이를 보고 관우를 벤 것에 대한 후환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었다.

연의에서 조조는 관우의 머리를 보며 인사를 하다,

갑작스레 눈을 뜬 관우를 보고 크게 놀란다. 이에 조조는 나무를 깎아 관우의 머리를 정성스레 붙여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8)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관우를 평하기를 “관우는 만 명을 대적할 만한 용맹한 장수이며 조조에게 보답을 하는 등 國士의 풍격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관우는 냉정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으로 결국에는 실패하였다” 라고 했다. 또 삼국지연의의 저자들은 관우는 거만하여서 유비가 오호대장군의 으뜸으로 세울 때 황충(黃忠)을 “황충 같이 늙어빠진 장수가 어찌 저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며 비난하였는데, 여몽은 이러한 관우의 단점을 이용하여 관우를 벨 수 있었다.

황충과 동렬에 있는 것에 대한 불쾌함을 드러낸 부분을 보면 관우는 유비 세력에서 경력과 공헌에서 부동의 2인자였다. 그와 같은 동렬인 다른 장수들인 장비는 초창기부터 함께 했고, 그의 능력이나 활약을 직접 옆에서 봤다.

마초는 한때 유비,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군웅 출신이라는 이름값만 보더라도 대단한 인물이고, 조운 역시 성실히 유비를 따르며 활약한 장수라 관우는 그들이 자신과 같은 대열 직위에 있어도 불만이 없지만 황충은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우선 황충은 유비가 형주에서 기반을 잡게 되고 난 후 얻은 인물이라 장비와 조운과 비교했을 때 둘이 같이 활약했던 경우가 매우 적다.

관우로서는 황충이 자신과 같은 대열에 있을만한 공훈과 능력이 있는지 알 기회가 없던 것이다.

오나라와의 갈등에서도 원인을 보면 손권 쪽이 억울한 피해자라고 볼 수 없다.

우선 손권은 겉으로는 동맹이라고 하면서도 유비가 가지고 있는 형주 땅의 소유권에 대해 늘 간섭하였다.

손권이 혼사를 제의했을 때도 손권 자신이 관우와 사돈이 되어 유비와 관우의 신뢰에 금이 가게 하려는 의도와 관우의 딸을 인질로 삼으려는 의도가 너무나도 분명했기에 관우 입장에서는 결코 손권과 오나라를 좋게 볼 수 없었다.

관우가 오만한 부분이 있고, 외교에서도 유연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일생을 장수로서 살아온 관우가 제갈량만큼의 정치적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9) 숭배의 대상이 된 관우, 이 부분의 본문은 관성제군이다.

도교에서는 관우를 신격화하여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부른다.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관우는 무의 화신으로 추앙 받는다.

관제묘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으로,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 출정 때, 이긴 것을 관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 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나 혹은 관제묘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몇몇 있다.

서울시 종로구에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가 바로 이 관왕묘 중 하나이다.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와 육손의 성과 같은 육(陸)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 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관우의 유해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현재까지 아무도 모르며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즉 관우의 묘는 묘(墓)가 아니고 관우의 위패를 모신 묘(廟)이다.

조조가 여포로부터 몰수한 적토마를 관우에게 주었으며, 관우가 패하여 생포 당하자 적토마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관우와 같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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