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사찰

불보사찰 통도사-2

유프랭크지안 2017. 7. 10. 16:20

통도사(通度寺)-2

(2) 봉발탑

통도사 봉발탑(通度寺 奉鉢塔)은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71호로 지정되었다.

통도사 봉발탑 높이는 약 3m이다.


통도사의 용화전 앞에 세워져 있다.

기단부와 발형(鉢形)의 신부(身部)로 된 석조물로서 하대석은 사각형 지대석 위에 놓였고 원형의 측면에 두 줄의 테를 둘렀다.

(3) 영산전 벽화

양산 통도사 영산전 벽화(梁山 通度寺 靈山殿 壁畵)는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 사찰에 있는 조선시대의 벽화이다.

2011년 4월 2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11호로 지정되었다.

<벽화 견보탑품도>

<벽화 협시청중도>



영산전 벽화는 벽체와 포벽은 물론 내목도리 윗벽과 대량ㆍ창방 등 내ㆍ외부 전체에 고루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 또한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어 조선후기 사찰벽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4) 동종(通度寺銅鐘)

범종루에는 보물 제11-6호인 통도사 동종의 모사품이 있어 성보박물관에서 사진으로 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랜다.

양산 통도사동종(梁山 通度寺銅鐘)

보물 제 11-6호

조선 중기에 승려 사인비구(思印比丘)가 만든 종이다.


이 종은 맨 위의 용뉴, 종 몸통의 상대와 하대, 유곽(遊廓) 등을 모두 갖춘 전통적인 범종의 모습이다.

상대에는 위아래 두 줄로 범자(梵字)가 배치되었고, 유곽 안에는 아홉 개의 유두가 있는데, 중앙의 하나가 특별히 돌출되었다.

종 몸통 가득히 명문이 새겨진 까닭에, 유곽 사이의 보살상은 작게 표현되었다.

종으로는 유일하게 팔괘(八卦)가 돌려 새겨져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종의 명문에는 1686년에 사인비구가 만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사인비구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약50여년동안 경기, 경상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승려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종 만드는 장인(匠人) 으로도 알려져 있다.

(5) 극락보전(極樂寶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봉안하는 극락전은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고도 하며, 또 극락세계에서 영원히 평안한 삶을 누린다 하여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아미타여래가 다스리는 곳이 서방 극락정토(極樂淨土)이기 때문에 극락전은 언제나 중심 불전의 서쪽에 위치하여 참배하는 사람들이 그곳을 향하도록 세워져 있다.

극락정토는 고통이 전혀 없고 즐거움만 있는 이상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 세계를 염원하는 사람은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염불을 외우며 극락에서 누리는 새로운 삶(極樂往生)을 기원한다.

우리나라에서 아미타 신앙은 그 어떤 신앙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여, 6. 7세기 무렵부터 이미 대중 속에 자리 잡았다.

삼국 사이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생겨난 수많은 희타 신앙으로 귀의(歸依)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극락전은 우리나라의 사찰에서 대웅전 다음으로 많이 세워진 건물이다.

그만큼 아직도 아미타여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과 함께 그 좌우에 관음(觀音)과 대세지(大勢至) 보살을 봉안한다.

이곳 통도사 극락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이 극락전은 1369년(고려 공민왕18)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초에 중건(重建)되었다.

이 건물은 통도사에 있는 세 개의 영역 가운데 하위 영역(下爐殿)에서 중간 위계(位階)에 해당하는 것으로, 외관의 평면 구조 역시 그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극락전은 극락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에 건물 자체도 화려하고 대웅전에 버금갈 정도로 내부 장식도 많은데, 이 극락전 역시 그렇다.

작은 건물임에도 팔작지붕에 받침기둥(活柱)을 갖추고 있다.


단청이 거의 사라진 극락전 벽면에는「반야용선」의 그림이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반야용선은 절에서 천도제를 하거나 큰 제를 지낼 때 등장을 하며, 또한 무속인들이 굿을 할 때 등장 하는데, 앞머리는 용 모양으로 되어 있고 꼬리도 용꼬리라 편의상 그냥 용선이라고 한다.

이 용선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 또는 진리나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 타고 가는 배이다.

한마디로 반야용선은 진리의 등불이자 중생을 이끄는 구원의 불빛과도 같다.

반야(般若)란 불교용어로 "진리를 깨달은 지혜" 라고도 한다.

따라서 지혜를 얻은 자들은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는 배를 타고 해탈의 바다를 건너 저쪽 해안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불교에서 쓰는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뜻하기도 한다.

이 배는 중생들에게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지혜를 주어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함으로 누구든지 반야용선에 승선하면 지혜를 깨달아 고통 없는 부처님 나라로 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역동적인 모습의 그림이 두 개 있는데, 머리위에 쓴 것을 볼 때 “손오공”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6) 만세루(萬歲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만세루는 본래 법회(法會)나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할 때 사용하던 누각(樓閣)이다.

이 건물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1644년(인조 22)에 영숙화상(靈淑和尙)이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건물의 외형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지만, 기둥이 높고 그 간격이 넓어 실물보다 훨씬 크게 보인다.


본래 누각은 바닥이 지면에서 높이 올라간 2층의 다락집으로, 기둥만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다.

그런데 이 건물은 낮은 받침(基壇)위에 단층 건물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사면 기둥 사이에 모두 창호(窓戶)를 설치함으로써 오히려 불당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들 창호는 제작 수법이나 재질로 보아 근래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데, 바닥을 낮게 만든 이유는 건물을 편리하게 이용하고자 한 데 있었을 것이다.

보통 산지에 위치한 절의 누각은 산지 경사로 인해 2층으로 오르게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통도사는 평지에 세워진 절이기 때문에, 이곳이 2층의 누각이었다면 의식을 거행할 때 오르내리기에 크게 불편하였을 것이다.

건물의 규모로 보아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 전국 승단 행정(僧團 行政)을 총괄하던 으뜸 사찰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잘 나타내는 건물이라 하겠다.

건물은 장식을 별로 하지 않은 익공계(翼工系) 팔작(八作)집으로 누각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랐다.


정면 중앙에 있는 양기둥 위의 건물 밖으로는 용의 머리를 새기고, 안으로는 물고기 꼬리 모양의 용꼬리를 장식하여 출입구로서의 중심성을 강조한 점이 특이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만세루’라 는 건물의 현판은 6세의 신동(神童)이 썼다고 한다.

(7) 영산전(靈山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

영산(靈山)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가르침(佛法)을 제자들에게 전한 곳이다.

바로 이 영산을 이 땅에 재현한 것이 영산전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참배하는 것은 부처가 제자들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설파한 영산회상(靈山會上)에 참석하는 것과 같은 효력이 있다고 한다.

이 영산전은 신앙의 정도에 따라 나누어진 통도사의 세 영역 가운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하위영역의 중심 불전으로 동서로 양옆에 약사전과 극락전을 거느리고 있다.

이런 구성은 조선 후기의 불화(佛畵)에서 흔히 삼세불(三世佛)로 표현되었다.

삼세불은 중앙에서 자리 잡은 현세의 부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왼쪽에 자리 잡은 과거의 부처 약사불(藥師佛), 오른쪽에 자리 잡은 미래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말한다.

세 건물로 이루어진 구조는 바로 이러한 삼세불의 배치와 일치한다.

영산전의 건축 연도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30)에 송곡선사(松谷禪師)가 중건한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 사찰의 중심 불전으로는 드물게 소박한 형식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아마 통도사 전체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과 격을 맞추기 위해 꾸민 것으로 짐작된다.

외형상으로 보면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범한 건물이지만 정면의 기둥간격이 넓어 외관이 위풍당당 하다.

이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또한 다포계의 화려한 장식을 사용함으로써 건물의 품격을 한층 높이고 있다.

내부 벽에는 다보탑(多寶塔)을 비롯하여 법화경의 여러 내용을 담은 품격 높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묘사한 팔상도는 1775년(영조51)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불화의 화풍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8)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1471호

극락전 앞에 위치한 이 3층석탑은 잘 다듬은 4매의 큰 돌(地臺石)위에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이중 받침돌로 기단부를 구성하였다.

상층 받침돌의 가장자리에는 각각 모서리 기둥(隅柱)을 새기고, 그 사이에 받침기둥(撑柱)을 두어 목조건물의 양식을 모방하였다.


하층 받침돌의 각면에는 코끼리의 눈을 형상화한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석탑의 장식기능을 강조하던 통일신라말기 즉 9세기 이후의 특징으로, 이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주요한 단서가 된다.

3층의 몸체(塔身)는 모서리기둥만 새겨두었을 뿐 별다른 조각이 없다.


4단의 받침대 위에 올린 지붕돌(屋蓋石) 역시 당대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꼭대기 부분에는 받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여러 장식을 올렸는데 현재 장식부분은 사라지고 없다. 전체적인 조성 방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말엽이나 고려시대 초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1987년에 해체하여 복원하였다.

그 당시 상층 받침대 부분 안에서 조선시대 백자가 발견되었으므로, 이 탑이 조선시대에 개축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층 받침대 아래의 다진 흙 속에서는 금동의 소형 불상 2구와 청동 숟가락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현재 이곳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배례석>

석탑기단 안에서 발견된 불상과 유물은 탑을 건립하기 전에 땅의 악한 기운을 누르며 땅을 다질 때 묻은 것(鎭壇具)이거나 혹은 탑의 건립과정에서 행하였던 여러 단계의 의식(儀式)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9) 약사전(藥師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

이 건물은 동방의 유리세계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별시키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불성(圓滿行)을 닦도록 도와주는 약사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약사여래는 동방세계를 다스리므로 언제나 약사전은 중심 불전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약사여래는 과거세계에서 약왕(藥王)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해 12가지의 소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므로 과거를 상징하는 부처이자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약사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유행하였는데 당시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자 약사여래는 새로운 구원자로 등장하였다.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병에 걸렸을 때 밀본법사(密本法師)가 “약사경”을 염불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국난이 닥쳤을 때마다 약사도량(藥師道場)을 열어 부처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을 만큼 약사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곳 약사전은 정면3칸, 측면1칸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1369년(고구려 공민왕18)에 성곡대사(星谷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이후에 중건된 것이다.

건축구조로 보면 통도사의 3개 영역 가운데 하위 영역의 중심 불전인 영산전과 유사하나 영산전과는 위계적 차이가 있다.

우선 건물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전면의 기둥 간격도 영산전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고 장식 역시 간소하다.

이러한 차이는 중심 불인 석가모니불과 약사불의 위계적 차이를 표현하는 건축 수법을 보여준다.

번잡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장식 솜씨 등이 오히려 건물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10) 석등(石燈)

통도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등이다.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3보사찰(三寶寺刹) 중 하나인 통도사 관음전 앞에 놓여 있는 석등이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8각의 받침돌을 3단으로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의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했다.

가운데기둥은 중앙에 3줄의 테를 둘렀다.

윗받침 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4각의 화사석은 각 면에 네모난 창을 크게 뚫어 불빛이 퍼져나오고 하였다.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꽃 장식을 달았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보주(寶珠: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의 석등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꽃장식이 세밀하지 못한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11) 가람각

가람각은 사찰의 토지를 관장하는 토지대신을 모신 곳으로, 사찰의 주인은 부처님이지만 부처님이 계신 사찰의 본래 주인은 땅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이는 불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토착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천왕문의 좌측에는 종루와 마주보고 일반 사찰에는 잘 볼 수 없는 가람각이 있다.

가람각은 통도사의 가람신을 모시고 가람(절)의 수호를 빌기 위한 곳이다.


따라서 이 가람각에는 부처와 상관없이 가람을 지켜주는 이곳의 터주 신(地神)이 모셔져 있는데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불교에서만 수용된 것이다,

이 가람각은 산신각과 함께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앙과 융화를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통도사 주지로 부임을 하면 먼저 이 터신에게 제를 지내고 가람의 안녕을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가람각의 내부 위쪽 모서리에 갈색의 도자기가 얹혀져 있다.


소금이 들어있는 항아리(염불화방지병)로서 화재를 막기 위한 벽사의 의미로 올려놓은 것이며 전각의 바깥쪽에도 있다.

벽면 가운데 가득하게 신중탱화가 있고 예전에는 탱화 앞에 나무로 만든 신상(神像)이 놓여있었는데 지금은 목신상(木神像) 대신 불명패가 자리하고 있다.


가람각은 사찰의 담장 안에 있으나 천왕문의 뒷쪽으로 물러나있어 가람 바깥에 배치되어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일반 절에서는 아예 사찰 밖 입구에 세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12) 호혈석

통도사에는 백운암에 얽힌 호랑이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그 전설을 뒷받침하는 2개의 돌이 있다

이 돌을 호혈석(虎血石)이라고 부른다.

하나는 하노전의 극락전과 급수대 사이의 땅바닥에 있고 또 하나는 상노전의 응진전 옆에 있다.

호혈석은 호랑이 기를 누르기 위해 호랑이 붉은 피를 발랐다는 넓은 반석으로 피가 묻은 것처럼 붉은 색이 얼룩져 있는 돌이다.

극락전 옆의 호혈석 위에는 움푹 파인 부분이 있는데 이를 호랑이의 발자국이라고 하기도 한다


평소에는 모래와 흙먼지로 덮혀 있어 식별이 싶지 않지만 물을 부으면 자국이 뚜럿하게 나타 난다

호혈석(虎血石)에 얽힌 전설이 있다.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백운암에는 젊고 잘 생긴 홍안의 스님이 홀로 기거하며 경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장차 훌륭한 강백(講伯:경전을 가르치는 스님)이 되기 위해 경 읽기에 매진하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저녁 예불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기원하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아직 잔설이 남아 있는 어느 봄날 저녁 무렵,

스님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예불을 마치고 경을 읽고 있었는데, 문득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젊은 여인의 곱디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고 기이하게 생각한 스님이 문을 열자 아릿다운 처녀가 바구니를 허리춤에 붙인 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친구들과 나물을 캐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고 헤매다 멀리 불빛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왔다며 하룻밤 묵어갈 수 있도록 간곡히 부탁을 하였다.

스님은 난처하긴 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 단칸방의 아랫목을 처녀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윗목에 정좌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습니다.

스님의 경 읽는 음성은 낭랑하였으며 고요한 산중에 울려 퍼지는 그 음성은 마치 신비경으로 인도하는 듯 처녀를 사로잡았고 그날 밤부터 처녀는 스님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날이 밝자 처녀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늘 백운암 스님에게 가 있었고 스님을 사모하는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마침내 처녀는 병이나고 말았다.

마을에서 지체 있는 가문의 무남독녀인 처녀는 좋다는 약은 다 썼으나 백약이 무효했고 처녀의 어머니는 딸이 마음의 병이 있음을 알고는 근심을 말해보라고 일렀다.

그때서야 처녀는 지난날 만났던 젊은 학승 이야기와 함께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아픔을 숨김없이 고백했고, 사연을 들은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백운암으로 스님을 찾아가 딸과 혼인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젊은 스님의 굳은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고. 얼마 후 처녀는 병이 악화돼 끝내 한 맺힌 가슴을 안고 눈을 감게 되었으며 죽은 처녀는 그날로 영축산의 호랑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고 그 젊은 스님은 초지일관해 드디어 강백이 되어 처음 강론을 열게 되었는데 저녁 무렵, 감로당 산중 연회가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더니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큰 몸집을 가진 호랑이가 감로당 지붕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문을 할퀴고 사납게 울부짖자 대중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필경 대중 속에 누군가가 저 호랑이와 사연이 있는 걸세.”

“그렇다면 각자 저고리를 벗어 밖으로 던져보세. 그럼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것이 아닌가.”

연회에 참석한 스님들은 저마다 저고리를 벗어 하나씩 밖으로 던졌으나 호랑이는 그냥 옆으로 밀쳐내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마지막으로 새로 취임하는 강백 스님의 저고리를 받더니 마구 갈기갈기 찢으면서 더욱 사납게 울부짖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강백 스님은 아무래도 소승의 속세 인연인가 보다하며 합장 예경하고 바깥 어둠 속으로 뛰어나갔고 호랑이는 스님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재빠르게 낚아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 산중 모든 대중은 강백 스님을 찾아 온 산을 헤매다가 스님이 젊은 날 공부하던 백운암 옆 산등성이에 상처 하나 없이 누워 있는 스님을 찾았으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남성의 상징이 보이지 않았다

미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호랑이로 태어난 처녀는 살아생전 흠모하던 스님과 그렇게라도 연을 맺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에도 호랑이의 횡포는 사그라질 줄 몰랐는데 그러던 어느 날, 통도사를 찾은 한 고승이 말하기를 '이곳은 호랑이의 기운이 넘쳐나는 곳이니 호랑이의 혈을 눌러야한다'며 붉은 피를 바른 큼직한 붉은 반석 2개를 도량에 놓게 하였다.

그러자 그 뒤부터는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며 이 때 가져다 놓은 반석이 ‘호혈석(虎血石)’이라고 한다.

호혈석을 ‘호석(虎石)’이라고도 부르는데 지금도 산신각에서 20m 남쪽 응진전 바로 옆과 극락전 옆 북쪽에 그 일부가 남아있다

(13) 범종각

통도사 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기둥을 층단주로 구성하였고 아랫층은 사방이 트인 상태로 창살을 달아 잡인의 출입을 막고 범종을 달아 놓았다.


아랫층에서 윗층으로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윗층에는 계자난간을 둘러 장식하고 활주는 상층 마루에 얹도록 하였다.

현판은 사방에, 범종루, 범종각, 통도사 등의 글씨가 적혀 있다.


통도사의 산내암자로는 관음암, 극락암, 금수암, 반야암, 백련암, 백운암, 보타암, 비로암, 사명암, 서운암, 서축암, 수도암, 안양암, 옥련암, 자장암, 축서암, 취운암 등 17개 암자가 있다.

(14) 구룡지(九龍池)

대웅전 옆의 연못은 구룡지(九龍池)로 불리며, 통도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가 남아 있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수행할 때 문수보살이 진신사리와 가사를 주면서 신라 영축산의 독룡 아홉 마리가 살고 있는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세우고 봉안하라고 알려주었다.


자장이 여덟 마리의 용은 쫓아 보냈으나, 마지막 남은용이 연못에 남아 터를 지키고 싶어 하여 연못 일부를 메우지 않고 남겨둔 것이 지금의 구룡지라는 전설이다.

해장보각

해장보각에는 통도사를 새로연 개산조 자장율사의 영정이 묘셔있다..

<해장보각 출입문>

<해장보각>

<통도사 개산조 자장율사 영전>

2. 영축산(靈鷲山)

높이 : 1,087 m

위치 : 경상남도 양산시

좌표 : 북위 35°31′00″ 동경 129°03′03″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과 원동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영남 알프스의 일부를 이루는 산이다.

높이는 1087미터. 신불산 아래에 위치하며 울산광역시와 양산시 경계지역에 있다. 단조늪이 있다.

영취산, 취서산(鷲棲山)과 축서산 등으로도 불린다.

1) 위치

영축산은 가지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줄기가 능동산에 이르러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남서진하는 줄기는 밀양의 천황산과 제약산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 내려와 배내고개를 건너 남진하는 줄기는 간월산과 신불산을 지나 영축산의 첫머리에서 높이 솟구쳐 계속 남쪽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남으로 조금 내려가면 영축산의 남쪽 산록에 있는 가지산 도립공원 내에는 큰 사찰인 통도사를 찾을 수 있다.

2) 지명유래

영축산은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에 있던 산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자 표기는 '영축산(靈鷲山)'과 '취서산(鷲栖山)' 두 가지로 표기되어 한글로 영축산 영취산 축서산 취서산 등으로 혼용되어 부르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한자 '취 또는 축(鷲)' 자에 대한 한글 표기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일반 옥편에서는 '독수리 취'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축'으로 발음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한편 '취 또는 축' 자가 원래 '축'으로 표기되었다는 근거는 1463년(세조 9)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법화경언해본]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산 이름의 혼용이나 혼재는 불교에서 유래된 축(鷲)자를 취(就)자와 조(鳥)자의 합자로 된 취(鷲)자와 혼동하는 원인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 2001년 1월 9일 양산시 지명위원회에서 영축산으로 확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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