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3
5. 김영환 대령
1951년 6.25전쟁 당시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에 적군들이 숨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명령에 불복 하고 해인사 안에 숨어 있는 적군들에게 폭탄을 투하 하지 않았다.
이는 해인사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며 2002년에는 해인사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린 공적비를 세웠다.
김영환金英煥
생애 : 1921년 1월 8일 - 1954년 3월 4일 (34세)
출생 : 일제 강점기 경성부
사망 : 대한민국 강원도 명주군
본관 : 경주(慶州)
별명 : 호(號)는 창공(蒼空)
종교 : 불교
부모 : 김준원(부), 변씨 부인(모)
친척 : 김기원(큰아버지) 김정렬(형)
복무 : 일본 제국육군 / 대한민국 육군. 대한민국 공군
복무 : 기간 1945년 - 1954년
최종 : 계급 일본군 육군 소위/ 대한민국 공군 준장
근무 : 공군 제1전투비행전단
지휘 : 공군 제1전투비행전단장
김영환(金英煥, 1921년 1월 8일 ~ 1954년 3월 4일)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대한민국 국군과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서울 사직동 출생으로 1938년 3월 서울의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1월 일본 간사이 대학 법과에 유학하여 1년을 마친 후 1945년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관동군 포병 소위로 함흥에 주둔 중 광복을 맞은 뒤 국군 창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2월 18일 대구 주둔 제6연대의 초대 연대장 및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고급부관 등으로 근무하면서 국군 창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7년 4월 육군 부위로 통위부 정보국장을 지낸 그는 1948년 4월 1일 공군창설 7인 간부의 일원으로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5월 2일 졸업하였다. 곧 이어 국군경비사관학교에 입대하여 미식훈련을 받은 다음 5월 14일 육군 소위로 임관, 육군항공총감부에 근무하면서 공군창설의 산파역을 수행하였다.
1948년 7월 21일 육군 항공기지사령부로 전속되어 작전과장 겸 인사과장으로 활동한 그는 1949년 3월 15일 공군 제1전투비행전단으로 이동하여 대대장으로 근무하였고, 한국 전쟁 발발 당시 공군 제1전투비행전단 제5대대 대대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1951년 8월 1일 공군 제1전투비행전단 제10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된 데 이어 9월 25일 공군 강원도 강릉전진기지사령부 부참모장으로 보임되었다.
1952년 6월 18일 공군 제1전투비행전단 부전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1953년 2월 15일 공군 제10전투비행전단장으로 취임하여 출격항공기에 대한 제1선 지휘관으로 작전부대 지휘 및 운영을 관장, 대한민국 공군의 출격작전을 수행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난 후인 1953년 12월 15일 공군 제1전투비행전단장으로 전보되어 전투조종사 양성에 주력하던 그는 1954년 1월 28일 공군 준장으로 진급하였으나, 1954년 3월 4일 공군 제10전투비행전단 창설 기념행사에서 비행 중 기체 추락으로 사망했다.
이후 전쟁을 수행하면서 수많은 전공을 거둬 1951년 충무무공훈장을 비롯해 1952년 미국 비행 훈장, 공비토벌기장, 한국 전쟁 종군기장을 수여받았고, 1953년에는 대통령수장과 을지무공훈장을, 그리고 1954년에는 대통령수장과 유엔종군기장, 미국 공로 훈장을 각각 수여받았다.
큰아버지: 김기원(金基元, 1878년11월9일~1934년7월14일, 일본 육군 중좌 전역.)
아버지: 김준원(金埈元, 1888년9월18일~1969년1월1일, 前 육군 경남병사구사령관. 1952년 대한민국 육군 준장 전역.)
형: 김정렬(金貞烈, 1917년9월29일~1992년9월7일, 前 국무총리. 1957년 대한민국 공군 중장 전역.)
6.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
평소 불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진 권양숙 여사는 2002년 10월 1일 당시 대선을 앞두고 합천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조계종 종정인 법전(法傳) 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대덕화(大德花)라는 법명을 받았다.
고(故) 육영수 여사와 같은 법명이다.
이러한 법명 수계는 불교계의 민심이 실린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불교계의 기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3회 해인사를 방문,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다 방문을 하였다.
2003년 12월 22일 노무현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경남 합천 해인사를 불시 방문해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환담한 뒤 오찬을 함께 했다.
사패산 터널 문제에 대한 공약을 못 지키게 되었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8월 30일 T-50 골든이글 양산 1호기 출고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해인사에 들러 비행기 사고 없이 잘 날아다니고 잘 팔아달라고 부처님께 기도를 했다. 취임 이래 두 번째 해인사 방문이다.
2007년 11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은 해인사 대비로전(大毘盧殿) 낙성 대법회에 참석, 축사를 하였다. 세 번째 해인사 방문이다.
2009년 5월 24일 해인사 승려 300여명이 분향소를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했다.
하안거를 깨고 나와 조문을 한 것으로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7. 해인사 건축물
1) 일주문
큰 절에 들어설 때마다 처음 만나는 것이 일주문이다.
절의 어귀에 서있는 제일문으로서 절의 위용을 한눈에 느끼게 해 주는 일주문은, 곧 모든 중생이 성불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의 첫 관문을 상징하니 초발심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일주문은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 세워져 문을 지탱하고 있는 건축구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해인사의 일주문은 홍하문이라고도 하며, 그 소박한 아름다움과 주위 경치와의 어우러짐이 일품인 까닭에 일주문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름이 나 있다.
신라시대에 절을 처음 세울 때부터 일주문은 지금의 자리에 있었겠지만, 조선시대 세조3년 봄에 중수하여 그 뒤로 지금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건축 양식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인 듯하다. 마지막 중건은 1940년에 있었다.
일주문 정면에 있는 현판의 글씨 "가야산 해인사"는 근대 서가의 대가인 해강 김규진의 글씨로서 산문의 격을 한층 더 높여 준다.
2) 봉황문
일주문으로 들어서서, 수문장처럼 버티어 서있는 천년 노목의 가로수를 따라 그 정취에 취해 걷다 보면 두번째 문인 봉황문이 나타난다.
이 봉황문은 천왕문이라고도 불린다.
큰 절은 으레 천왕문이나 사천왕문 또는 금강문 따위로도 불리는 문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이 안에는 돌이나 나무 등으로 조각되거나 탱화에 그려진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은 본디 욕계 육천 가운데 사왕천에 머물면서 천상으로 들어오는 여러 착한 사람을 보호하는 선신으로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위치하여 악한 것을 멸하고 불법을 옹호하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산문 입구에 봉안하여 수문역과 도량 수호역을 맡게 하였다.
이러한 신중들은 대부분 힌두교의 영향이며, 불교가 대중화하는 가운데 인도의 민간 신앙과 함께 접합될 때 생긴 사상이다.
3) 해탈문
일주문과 봉황문을 지나면 해인사의 제3문인 해탈문이 있다.
중문에 속하는 문으로써 일반 사찰의 불이문에 해당한다.
해탈문을 지나면 완전한 불법의 세계는 주 객, 세간과 출세간, 선과 악, 옳고 그름, 나고 죽음 등 대립하는 상대적인 것들을 초탈한 불이법문의 세계로써 삼존불을 모신 건물 앞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일주문에서 해탈문에 들어설 때 까지 33계단을 거치는데, 도리천 곧 33천의 궁을 상징한다.
4) 우화당
해인사 첫번째 출입문인 봉황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이는 것이 요사채인 우화당이다.
5) 사운당
덕 많은 수행자와 신심 깊은 신도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든다는 의미의 이 건물은 창건년도는 알 수 없고 1490년에 중수되어 그 이후에 몇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치게 되는데 지금의 건물은 1984년에 완전 중수되어 지금은 종무소와 종무소임자들의 방사(房舍)로 사용되고 있다
6) 보경당
이 건물은 근래에 불교회관으로 지어졌다.
여러 큰 불사에 집회장과 법당으로 쓰이도록 설계되었는데, 해인사의 다른 건물들에 견주어 지나치게 크게 지어진 감이 없지 않으나, 지하층도 크게 내어 여러모로 쓸모있게 지어진 집이므로 불사 때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7) 종각
종각에는 사물이라고 불리는 법기(法器)가 설치되어 있다.
사물은 범종 · 법고 · 목어 · 운판을 말하는데 이 범종각은 사찰의 경내에서 마당을 내려다보았을 때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왼쪽을 체로 오른쪽을 용으로 말하는 화엄의 사상에 따라 설치 된 것이다.
8) 청화당
청화당(淸和堂)은 백호 부분인데 이 부분을 보호하고 북풍을 막기 위해서 정미소와 쌀 창고는 등산로 곁으로 옮기고 1984년 새 건물을 짓고 서전이라고 편액을 달았다가1989년 청화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주지실로 사용되고 있다.
9) 구광루
구광루는 해인사의 모든 건물 가운데에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구광루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내용에서 따온 것인데,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 아홉 곳에서 설법하시면서 그 때마다 설법하시기 전에 백호에서 광명을 놓으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는 노전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만이 법당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누각은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이 모여 예불하고 설법을 듣는 곳으로서 지은 것이다.
10) 적묵당
스님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적묵당이다.
11) 궁현당
창건년도는 확실히 알 수 없고 1940년에 중창되었으며 이후에도 몇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게 된다.
현재의 건물은 1988년에 완전 복원된 건물로서 해인사 승가대학(강원)의 교사(校舍)로 사용되고 있다.
깊고 오묘한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의 궁현당은 달리 부처를 가려 뽑는 곳이라는 뜻의 선불장(選佛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12) 관음전
구광루 오른쪽에 관음전(觀音殿)이 있다.
현재 강원(승가대학)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약 100여명의 스님들이 경전을 연마하고 있다.
건물의 현판은 궁현당과 같이 두 개인데 그 하나는 심검당(尋劍堂)이다 .
심검이라는 말은 모든 번뇌를 베어 버릴 수 있는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수행의 목적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이 건물도 해인사 강원(승가대학)으로 사용하고 있다.
13) 경학원
지금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학원은 가의대부 민형식의 주선으로 범운화상이 창건하였는데 본디 왕과 왕후와 태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경홍전이라 편액하였던 건물이다.
그 뒤에 1946년에 이르러 환경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손수 경학원이라고 글씨를 써서 건물의 이름을 바꾸었고, 1968년에 지월화상이 중수하여 이듬해부터는 해행당에 봉안되어 있던 역대 고승들의 영정을 옮겨 모셨다가, 1975년부터 승가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해오고 있다.
14) 대적광전
한사원의 큰 법당에는 부처상이나 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큰 법당의 이름은 그 안에 모신 주불에 따라 결정된다.
그 주불이 바로 그 사원의 정신적인 지주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하여 창건되었으므로, 거의 모든 절이 흔히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인 바이로차나 Vairocana에서 온 말로서, 영원한 법 곧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은 부처님의 진리의 몸이 화엄경을 언제나 두루 설하는 대적광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의 건물은 창건주인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이 802년에 지은 건물 자리에다 1818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법당 안에는 일곱 불상이 모셔져 있다.
법당에 들어서 보면, 왼쪽부터 철조관음보살, 목조 문수보살, 목조 비로자나불이 있고, 그리고 맨 가운데에 본존 비로자나불이 있고 다시 그 옆으로 목조 지장보살, 목조 보현보살, 철조 법기보살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다.
본존 비로자나불은 1769년에 조성되었는데, 그 왼편에 있는 또 하나의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가운데의 본존불을 모시기 전까지의 본존불이다.
이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그 좌우의 보현보살상, 문수보살상과 더불어 삼존불로서, 고려시대에 가지가 셋인 큰 은행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삼존불은 처음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금당사에 모셨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가야산의 용기사를 거쳐,1897년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시게 되었다.
그 밖의 불상들은 조성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
15) 명부전
명부전은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지옥 중생을 모두 제도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이 목조로 조성되어 주불로 모셔져 있고 그 좌우에 각각 도명보살과 저승에서 죽은 이들을 재판한다고 하는, 일명 시왕이라고 하는 십대왕이 있다.
명부전은 저승에 간 이들의 넋을 제도하는 곳으로, 사십구재를 비롯한 갖가지 제의들이 이곳에서 행해진다.
지금 건물은 1873년 곧 고종 십년에 지어졌다.
16) 응진전
나한전이라고도 불리는 응진전은 1488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지금의 건물은 1817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역대 선사의 영정만을 봉안했는데, 1918년에 판전 서재에 봉안되었던 십육 나한을 옮겨와 모셨다.
응진전 가운데에는 석가여래상이 토조로 조성되어 있다.
17) 독성각
응진전과 명부전 사이에 독성각이 있다.
한때 독성 용왕 삼신상을 모시고 삼성각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독성 한 분만을 모셔서 독성각으로 불린다.
18) 선열당
선열당은 종래에 하선원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노전실과 부방장실과 영정 안치실로 쓰이고 있다.
특별히 노전실은 응향각이라고도 하는데 응향각은 향을 사른다는 뜻이고 노전은 의식을 집전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19) 장경판전
대적광전 위에는 장경판전이 자리하고 있다.
장경판전은 대장경을 모신 건물로, 이 형국은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부처님께서 법보인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을 나타내므로 더욱 뜻 깊다.
국보 52호로 지정된 이 장경각을 처음 세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때가 1397년임을 미루어 볼 때 지금의 건물은 조선초 무렵인 1488년쯤에 세워졌으리라고 여겨지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부분적인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장경판전은 모두 네 동으로 되어 있다.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하고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전이라고 하는데, 이 두 건물을 잇는 작은 두동의 건물에는 사간판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이 장경각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조 초기의 건축물 가운데에서 건축 양식이 가장 빼어나서 건축사적인 면에서도 퍽 중요하게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이 건물은 대장경을 보관하는 데에 절대적인 요건인 습도와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도록 지어졌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장경각의 터는 본디 그 토질 자체도 좋거니와, 그 땅에다 숯과 횟가루와 찰흙을 넣음으로써, 여름철의 장마기와 같이 습기가 많을 때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또 건조기에는 습기를 내보내곤 하여서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더 원활하게 하려고, 판전의 창문도 격자창 모양으로 하였으며, 수다라전의 창은 아랫창이 윗창보다 세배로 크게 하였고 법보전의 창은 그 반대 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아주 과학적인 통풍 방법으로서, 오히려 건축 방식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따라가기 어려운 우리 선조들의 슬기를 잘 보여 준다.
20) 퇴설당
퇴설당을 처음 창건한 시기는 알 수 없고, 다만 해인사에 여섯번째로 큰불이 나던 해인 1817년에 그 불로 모두 타 버리자 제월대사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시 1965년에 근담화상이 해체하여 보수하였다.
이 퇴설당은 최근까지 상선원으로 사용되었는데, 특히 1899년에 경허 대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동수정혜결사를 실천한 장소였던 점에서 역사적인 수행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서의 의미가 깊다.
선원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됨에 따라 현재는 총림 방장실로 사용하고 있다.
21) 조사전
일명 조사전이라고도 불리는 해행당은 1817년에 제월선사가 퇴설당을 중창할 때 함께 중창하고 수선사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처음에는 선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이회광이 주지로 있을 때 선객들이 드세다 하여 수선사를 폐하고 조사전이라고 이름을 바꾸면서 개산조 이하 역대 고승의 영정을 모셔 왔다.
1967년 목조 희랑조사상을 보장전으로 사용하는 구광루로 옮기고 이듬해에 해인총림을 설치하여 영정을 모두 경학원에 봉안하고서부터는 다시 상선원으로 사용해 오다가, 현재는 방장 부속실로 사용하고 있다.
22) 선원
이 선원은 1973년 6월에,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장경각이 목조여서 화재의 위험이 있다 하여, 시멘트로 신장경각 건물로서 건축한 것이나, 대장경을 옮겨 모시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적합하여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건물이다.
그러다가 1983년부터 선원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23) 극락전
지금 율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극락전은 독립된 산내 암자로서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1965년에 자운스님께서 화주가 되어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여 지금의 선원 자리에 중수하였고, 그 뒤에 다시 1973년에 봉주화상이 주지로 있을 때 대장경판전을 신축하기 위하여 건물을 지금의 자리인 100자 아래 지점에 새로이 옮겨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율원으로 쓰이는 한편 한주 스님들의 거처로도 사용되고 있다.
24) 정중탑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 아래 넓은 뜰에 자리 잡고 있어 정중탑(庭中塔)이라 한다.
1985년 11월 14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54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의 기본 형식이 나타나 있고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이 6m로 큰 탑에 속하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3층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이 있고 정상에 상륜부(相輪部)가 있는데, 원래는 2층 기단이었으나 1926년 중수할 때 1층이 더해졌다.
기단부는 상층 기단 양쪽에 우주(隅柱)와 장주를 하나씩 모각했으며, 탑신에는 우주 이외의 별다른 조각이 없다.
옥개받침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의 전각에는 후대에 설치한 풍경(風磬)이 달려 있다.
처마 끝의 반전은 심하지 않으며 탑의 상륜부에는 노반, 앙화, 구륜(九輪),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1926년 6월 중수할 때 상층 기단의 석함(石函)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중수가 끝난 뒤 다시 석탑 안에 봉안했다. 석탑 앞에 놓여 있던 안상과 연화무늬가 새겨진 직사각형의 봉로석(奉爐石)은 석등(경남유형문화재 255) 앞으로 옮겨놓았다.
25) 수미정상탑
장경각 뒤쪽에 있는 이 탑은 원래 돛대바위라 불리워지던 거대한 바위가 있었던 곳에 그 무게만큼의 탑을 다시 세운 것이다.
해인사 지형이 떠가는 배의 형국이라 돛대바위의 역할이 중요함을 감안하여 1986년에 다시 세웠다.
높이는 약14미터이고 8각7층석탑이다.
26) 대비로전
2007년 11월 24일 정면 3칸, 측면 3칸 그리고 다포형식을 가진 대비로전을 낙성하고 대적광전과 법보전의 동형쌍불(同形雙佛)인 두 비로자나 부처님을 나란히 안치하였다.
쌍둥이 비로자나불은 2005년 7월 개금하는 과정에서 불상 내부에 문서가 발견돼 883년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국내 최고(最古)의 불상임을 확인하였다.
27) 만월당(템플스테이)
28) 해우소
해우소(解憂所)란 사찰에서 화장실을 일컫는 말이다.
근심을 해소하는 곳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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