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사전-ㅈ부-15
지수사(地水師)
성명 역괘 86 괘.
풀로 허술하게 만든 집에서 부부가 만나니 부인과의 화합을 어찌 바라겠는가.
부부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니 이를 부부의 정이라고 하겠는가.
지수사(地水師) 年運
위는 땅坤이요 아래물 水坎이다.
師는 군대의 집단을 의미하며 집단의 지도자를 상징하는 고로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에 임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卦다.
이 卦를 얻으면 싸움터로 나가는 장군과 같다 전쟁에는 위엄과 고난이 많다.
정도를 지키며 무슨 일이라도 긴밀 엄수하고 충분한 작전을 짜서 찬스를 노려야 한다.
경솔하게 일을 추진하면 타인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
군자는 이卦를 얻으면 이 괘상의 뜻을 본받아 넓은 은덕을 만민에게 베풀어 아랫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기에 노력하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당신의 큰 뜻을 이해하고 적극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계획한 목적은 무난히 달성한다는 괘이다.
지암지암(持闇持闇)
단동십훈(檀童十訓)의 하나.
손을 폈다 쥐는 동작을 반복하는 잼잼은 한자어 지암지암(持闇持闇) 줄임말로 세상의 밝고 어두운 것을 가리라는 뜻이다.
지옥(地獄) 종류
지옥은 나락(奈落, nakara)를 번역한 말로서 이승에서 악업(惡業)을 지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으로 온갖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말한다.
팔열지옥(八熱地獄) 팔한지옥(八寒地獄) 화탕지옥(火湯地獄) 도산지옥(刀山地獄) 발설지옥(拔舌地獄)
지원(地元)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
지지(地支)를 이르는 말.
지인(至人)
사람의 다섯 품계의 오위(五位)의 하나.
1급(상급)의 4번이다.
지인(至人)은 진실하고 곧은 것으로 바탕을 삼고 한결같이 진리를 지켜 변하지 않는다.
착하고 악한 것이 그 생각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영화와 욕됨이 그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지인(智人)
사람의 다섯 품계의 오위(五位)의 하나.
3급(중급)의 5번이다.
지식 지혜와 생각이 통달해서 사물의 실정을 살피면 싹트는 조짐을 알고 착하고 악한 것을 미리 아는 사람을 지인이라 한다.
지일법(知一法)
知一法은 일명 비용법(比用法)이라고 하며, 賊剋法과 비슷하나 下賊上이나 上剋下가 두 곳 이상일 때에는 적극법(賊剋法)을 취함의 무리가 됨에 점단(占斷)하는 날이 陽日인지, 陰日인지를 살펴 陽日이면 陽支를, 陰日이면 陰支.
지장간(地藏干)
장간(藏干) 암장(暗葬)의 또 다른 말.
지지의 여기 중기 정기의 천간을 이르는 말.
十二地支 속에는 天干이 감추어져 있다.
十二地支는 12月과 같은 것이니 24절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에 그 원리는 기상학(氣象學)적 해석으로 풀이하게 된다.
하늘은 가볍고 맑은 기(氣)요.
땅은 무겁고 탁한 질(質)이다.
天干을 천원(天元)이라 하고 地支를 지원(地元)이라 하며 지장간(支藏干)을 인원(人元)이라 하여 이 셋을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라고 한다.
지장간에는 여기(餘氣), 중기(中氣), 정기(正氣)가 있는데 1개월 (30일)간의 기후의 변화를 셋으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① 여기(餘氣) : 전월(前月)의 氣가 남은 것이고,
② 중기(中氣) : 여기와 중기의 중간 氣란 뜻이고,
③ 정기(正氣) : 地支 五行의 본기(本氣)를 뜻한다.
月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地支 | 寅 | 卯 | 辰 | 巳 | 午 | 未 | 申 | 酉 | 戌 | 亥 | 子 | 丑 |
여기 | 戊7 | 甲10 | 乙9 | 戊7 | 丙10 | 丁9 | 己7 | 庚10 | 辛9 | 戊7 | 壬10 | 癸9 |
중기 | 丙7 | 癸3 | 庚7 | 己9 | 乙9 | 壬7 | 丁3 | 甲7 | 辛3 | |||
정기 | 甲16 | 乙20 | 戊18 | 丙16 | 丁11 | 己12 | 庚16 | 辛20 | 戊18 | 壬16 | 癸20 | 己18 |
<여중정 일수>
地支 | 여기 | 중기 | 정기 | 기타 |
寅申巳亥 | 7 | 7 | 16 | |
子午卯酉 | 10 | 20 | 午는 10. 9. 11 | |
辰戌丑未 | 9 | 7 | 18 | 未는 9. 9. 12 |
지장경
① 원명은 지장보살본원경
② 대승대진지장십륜경, 점찰선악업보경과 함께 지장 3부경의 하나.
③ 지장보살의 사상과 그 원력 및 중생의 업보를 점쳐 지장보살에게 참회함으로써 모든 업장을 소멸케 하는 실천법을 설함.
지장보살(地藏菩薩)
1) 석가여래의 당부를 받고 도리천에서 매일 아침 선정에 들어 중생의 근기를 관찰하고 석존 입멸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6도에 몸을 나타내어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한 보살이다.
천관을 쓰고 가사를 입고 왼손에 연꽃을 들고 바른 손으로 심무외인을 짓고 있다.
혹은 왼손에 연꽃을 쥐고 오른 손에 염주를 들기도 하며, 후에 석장을 짚거나 동자를 안은 형상도 생겼다.
2) 육도 윤회에 끝없이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 석가모니부처님이 입멸 후 미륵부처님 출현시까지 중생을 교화함.
형상은 민머리거나 특수한 가운형 두건을 쓰고 가사를 입고 연꽃을 들고 있으며 바른손에 보배구슬 혹은 석장을 짚은 모습이다.
명부를 주재하는 지옥 10왕을 거느림.
지장전(地藏殿)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
염라대왕 등 10왕을 함께 모시면 시왕전이라 한다.
명부전(冥府殿)은 죽은 영혼이 가는 저승을 상징하는 곳이다,
안에는 저승의 심판관인 10대왕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 이라고도 한다.
명부전 지장삼존 배치도는 아래와 같다.
1) 명부전의 보살상(지장 삼존) 배치로는 무독귀왕, 지장보살, 도명존자. 이 법당 안에는 저승의 왕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봉안되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冥府十王像)을 안치하며, 시왕 앞에는 각각 시왕을 시봉하는 동자상 10구가 안치되어 있다.
이밖에도 판관(判官재판관)2구, 녹사(錄事기록을하는 서기)2구, 문 입구에 장군 2구 및 인왕상이나 금강역사 등을 배치하여 20여개의 존상을 갖추고 있다,
2) 명부전의 주불인 지장보살은 불교가 이상으로 하는 구원(救援)을 상징하는 부처님이다. 그분은 모든 중생들이 구원받을 때까지 자신이 부처가 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중생을 모두 교화해서 성불을 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보살이다,
3) 지장(地藏)이라는 이름을 받게 된 이야기로, 옛날 인도의 어느 부자집 외동딸로 태어난 18세 처녀가 추운 겨울날 아침, 대문밖에 나가 보니 나이 어린 아이가 먹지도 입지도 않고 헐벗은 채로 얼어 죽기 직전에 있음을 보고서 처녀는 서슴치 않고 자기 옷을 벗어 입혀주어 얼어 죽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알몸이 된 처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주저하고 있을 때, 마침 그것을 본 땅의 신이 신통력을 발휘해서 땅에 구멍을 만들어 그 구멍 속에 처녀의 몸을 감추어 주었다. 그녀의 착한 마음에 감동한 땅이 그의 몸을 ‘땅에 감춘다.’하여 땅 지(地)와 감출 장(藏)이 생겼다고 한다.
4) 지장보살은 이미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성불을 뒤로 미루고 중생 제도에 나선 한량없는 자비심을 가지신 보살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지장보살을 섬기는 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
특히 죽은 조상들이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후손들의 효심은 늘 지장보살의 자비심에 의지하게 되었다.
5)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날로부터 49일까지 7일마다 드리는 49제, 그 뒤에는 100일제, 소상제, 대상제까지 10번을 시왕 앞에 나아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선악의 업을 심판받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마다 절에서는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고 저승 십대왕들의 심판이 후하게 내리도록 지장보살에게 의지하여 비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염라대왕은 5번째 대왕을 말한다.
6) 지장보살을 왼쪽에서 협시하는 도명존자는 본디 중국의 양주에 있는 개원사의 스님이였으나 778년 2월 8일 누런 옷을 입은 저승차사 3명이 그를 저승으로 잡아갔다, 그런데 저승 가서 보니 용흥사의 도명을 잡아가야 하는 것을 잘못 잡아간 것이 밝혀져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런 일로 도명스님은 지옥을 출입한 스님이라 하여 지장보살을 모시게 되었고, 무독귀왕은 지장보살이 전생에 살 때 선생님으로 계셨던 분으로 그 인연으로 지장보살을 시봉하고 있다고 한다.
지장정혈법(指掌定穴法)
풍수(風水) 혈세(穴勢)의 하나.
용진혈적(龍眞穴的)은 했는데 청룡백호(靑龍白虎)가 가까이서 감싸주지 못한 혈지(穴地)에서 사용하는 법(法)이다.
혈장(穴場)을 사람의 손바닥과 손가락에 비유하여 혈(穴)을 정(定)한다.
손바닥에는 장심혈(掌心穴)이 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각각 다른 지혈(指穴)이 있다.
1. 장심혈(掌心穴)
혈지(穴地)가 마치 손바닥을 젖혀놓은 모양과 같이 생겼다.
이를 앙장형(仰掌形)이라고 한다. 이때는 손바닥 가운데 오목한 부분이 혈(穴)이다.
그러므로 와혈(窩穴)에 해당된다.
손바닥 가의 도톰한 부분은 청룡(靑龍)과 백호(白虎) 역할을 하여, 바람과 물의 침범을 막아 준다.
2. 지혈(指穴)
혈지(穴地)의 모양이 마치 손가락의 엄지와 검지가 집게모양으로 한 것과 같다.
이때 는 손가락에 있는 穴을 참고하여 穴을 찾는 방법(方法)이다.
엄지와 검지에는 7개의 혈(穴)이 있다.
이중 대부혈(大富穴) 구혈(毬穴) 홍기혈(紅旗穴) 곡지혈(曲池穴)등 4개의 길(吉)한 혈(穴)과 절혈(絶穴) 소탕혈(掃蕩穴) 조화혈(燥火穴)등 3개의 흉(凶)이 있다.
1) 대부혈(大富穴)
엄지 제1절에 있는 혈(穴)이다.
왼손처럼 생겼으면, 집게손가락 쪽의 능선이 청룡(靑龍)이 되어 혈을 완전히 감싸주어야 한다.
엄지손가락 끝으로 뻗은 능선은 백호(白虎)가 된다.
오른손은 그 반대다. 엄지와 집게손가락 끝이 만나는 지점은 수구(水口)가 되는데 잘 막아 주어야 한다.
2) 구혈(毬穴)
엄지와 검지가 갈라지는 중간 부분에 맺는 혈(穴)로 호구혈(虎口穴)이라고도 한다.
엄지와 검지가 청룡백호(靑龍白虎)가 되어 혈(穴)을 잘 감싸주어야 한다.
3) 홍기혈(紅旗穴)
집게손가락 제1절에 있는 혈(穴)이다.
혈 아래가 허하기 때문에 토순(吐脣)이 발달되어 있어야 한다.
4) 곡지혈(曲池穴)
집게손가락 제2절에 있는 혈로 횡룡입수(橫龍入首)하는 경우가 많다.
뒤에는 귀성(鬼星)과 낙산(樂山)이 있어야 한다.
명당(明堂)이 평탄하고 원만해야 하며 엄지와 집게손가락 끝 부분의 수구가 관쇄(關鎖)해야 진혈(眞穴)을 맺는다.
5) 절혈(絶穴)
엄지 손끝 부분으로 환포(環抱) 해주는 청룡백호(靑龍白虎)가 없이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흉(凶)하다.
6) 소탕혈(掃蕩穴)
엄지와 집게손가락 중간의 구혈(毬穴) 아래에 있다.
위는 평탄하고 아래는 낭떠러지기로 쓸어내리는 듯이 기울어 흉하다.
7) 조화혈(燥火穴)
집게손가락 제1절 홍지혈 위에 있다.
돌출된 부분으로 바람을 많이 받는다.
대개 과룡처에 해당되기 때문에 흉하다.
지전(知殿)스님
殿主(전주)스님, 불전에 대한 청결, 향, 등 등의 일체를 맡은 스님.
대웅전이나 다른 법당을 맡은 스님을 노전스님이라 한다.
지지(地支)
子 쥐. 丑 소. 寅 법. 卯 토끼. 辰 용. 巳 뱀. 午 말. 未 양. 申 잔나비.
酉 닭. 戌 개. 亥 돼지. 십이지. 십이 띠.
지지순서(地支順序)
지지 | 子 | 丑 | 寅 | 卯 | 辰 | 巳 | 午 | 未 | 申 | 酉 | 戌 | 亥 |
동물 | 쥐 | 소 | 법 | 토끼 | 용 | 뱀 | 말 | 양 | 잔나비 | 닭 | 개 | 돼지 |
발가락 | 4.3 | 2 | 5 | 4 | 5 | 혀2 | 1 | 2 | 5 | 4 | 5 | 2 |
12지지의 음양의 구분은 발가락 숫자로 구분했다.
12지의 陽은 체(體)이고 음(陰)은 용(用)이 된다.
단 子와 亥巳와 午는 체용이 변화되어 子와 午의 體는 陽이고 用은 陰이 되고 巳와 亥의 體는 陰이고 用은 陽이된다.
12지지에서 子(쥐)를 제일 먼저 배열한 것은 子는 陰陽의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陰이고 오늘은 陽으로 이 陰과 陽을 동시에 걸쳐있는 것이 하루의 시작인 子時로 子는 음양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地支 동물의 陰陽의 분류는 발가락의 숫자로 배열했는데 12동물 중 11동물은 앞뒤의 발가락 숫자가 동일한데 비해 쥐의 발가락은 앞4개 뒤5개로 되어 있다.
日의 분기점인 子正인 0시를 쥐의 몸 가운데로 하고 앞발가락 4개를 陰은 전날 23시에서 0시가 되고 뒷발가락 5개는 陽인 당일 0시에서 01시로 보며 쥐는 한 몸에 陰陽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분기점에 놓게 되었다.
또한 午는 말로서 발가락이 1나이다. 은 子방향으로 子를 원의 출발점이라 한다면 子에서180°위치는 南으로 원360°의 반이 되며 子의 대치 방향에 위치하며 12地支의 반이 된다. 루의 중심점이 南으로 시보의 기준시점도 정오를 기준 한다. 그리하여 발가락이 하나인 말(午)로 정하게 되었고. 또한 南은 火로서 火는 뒤로 물러설 줄 모르고 앞으로 옆으로 펼쳐 나가고자 하는 성질이 있는데 말이란 동물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앉거나 눕지를 않고 주야간 서서 지낸다. 러하기에 南쪽을 午(말)로 표시했으며, 또한 午는 체(體)는 陽이고 용(用)은 陰이다.
東쪽은 卯(토끼)방향으로 발가락 4개이고 西쪽인 酉(닭)방향도 발가락이 4개이다. 여기서 12地支의 동물의 발가락 숫자를 자세히 보면 흥미롭다.
地支 陽은 子(쥐) 午(말)을 제외한 寅(범) 辰(용) 申(잔나비) 戌(개)는 발가락이 전부 5개가 있다. 地支 陰은 卯(토끼) 酉(닭)을 제외한 丑(소) 巳(뱀)혀2 未(양) 亥(되지)는 2개씩이다.
지지충(地支沖)
일명 六沖이라 한다.
대대(對待) 작용으로 기운이 서로 상살(相殺) 된다.
子午沖 :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다.
丑未沖 : 매사에 어려움이 많다.
寅申沖 : 다정다감하며 토닥거린다.
卯酉沖 : 믿는 사람에게 배반을 당한다.
辰戌沖 : 외롭고 고독하다.
巳亥沖 : 위약 관계가 많고 중상모략이 많다.
1) 年支와 月支가 沖을 하면. 일찍이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긴장된 나날을 보낼 수 있다.
2) 日支와 月支가 沖을 하면. 부모와 인연이 박덕하고 형제간에 불화 하여 외롭고 고독하다.
3) 日支와 時支가 沖을 하면. 처자식과 인연이 없어 흩어져 살 수 있다.
4) 年支와 時支가 沖을 하고, 月支와 日支가 沖 하면. 성격이 난폭하고 배은망덕한 행위를 할 수 있다. 말년의 운세가 불행하다.
5) 日支와 대운 세운의 地支와 沖을 하면. 부부간에 불화 분쟁이 생기고, 자신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며 관액(官厄)이 생긴다.
6) 子午沖. 卯酉沖이 가장 강력하고, 寅申沖. 巳亥沖은 암장 상호의 대립이 심하고, 辰戌沖. 丑未沖은 흙이 흔들리니 지진과 같고 심하면 이웃 干支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지창룡(池昌龍) 풍수대가
1) 호는 청오(靑奧),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아버지는 지태현(池泰賢)이며, 어머니는 김해 김씨로 김간난(金干蘭)이다.
시흥시 군자동 354 구지정 마을에서 출생했다.
2) 구지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선생은 군자공립보통학교(현 군자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공업계통의 학교를 졸업하자 가와사끼에 있던 일본 강관 주식회사 공장의 용광로 책임자로 취직했다.
그곳 공장에서 능력이 인정되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평양제철소의 전권 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3)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어느 일요일 오후 공원에 나가 산책하던 선생은 자신의 일생을 결정짓게 만든 동포와의 우연한 만남을 갖게된다.
모모야마(桃山) 공원의 명치릉(明治陵)을 지나던 선생은 어떤 노인이 능 부근에서 이상한 패철을 들고서 주위 형세를 살펴보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뜻밖에도 그 노인은 한국인이 어서 동포인 선생에게 아주 흥분된 어조로 자신이 느낀 천리(天理)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 일본 제국주의는 곧 망하게 돼. 이것은 천명(天命)이야. 세상을 거역하려 들었으니 망하는 것은 당연한 거지. 지군, 일본 황실이 이곳에 명치릉을 묘터로 썼기 때문에 3대째를 못 넘기고 한번 주저앉게 될 운명이야. 전쟁에서 패할 날이 멀지 않았어.” 선생은 노인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기억을 지닌 채 선생은 24세 때인 1945년 5월 평양제철소 전권 소장으로 부임하기 위해 관부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4) 부산에 도착하자 평양으로 가지 않고 곧장 합천 해인사로 갔다. 그곳 스님의 도움으로 해인사에 소속된 깊은 암자에 칩거할 수 있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역리학(易理學) 공부에만 전념했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다. 특히 역리학과 관계되는 서적이면 이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고 하여 거의 욀 정도가 되었다.
당시에는 누구의 가르침도 없었다. 되풀이하여 반복되는 독서를 통해 이처럼 하나 둘씩 스스로 깨닫기 시작했다.
선생의 암자생활은 115일 만에 끝이 났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암자에 있는 동안 어려운 한학을 독학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갔다. 바로 이 시기가 선생이 역리학에 관한 이론적 철학적 기초를 확립하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5) 암자에서 나온 선생은 경북 봉화에서 공부하다 1년 뒤 경기도 이천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한동안 농사일에 종사했다.
29세가 되던 해(1950) 3월, 조만간 큰 변란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감한 선생은 부인과 함께 이천에서 밀양으로 옮겼다. 휴전(1953)뒤 서울시 중구 을지로 7가 18에 사무실(지청오)를 열고 사망 직전까지 그곳에서 활동을 하였다.
6) 선생이 풍수지리를 터득한 후 관계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한국전쟁 직후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예기치 않았던 동족상잔간의 한국전쟁으로 전몰한 국군장병들이 때로는 이름 없는 넋이 되어 전국 곳곳에 산재하였던 것을 한 곳에 안장하기 위해 국군묘지 설립에 대해 후보지를 물색, 선정키로 계획을 세웠다.
당시 후보지로는 서울 우이동, 덕소, 말죽거리, 소사(현 부천시), 팔당댐 주변 등이었다.
전국에 내노라하는 풍수지리가 들이 동원되었다. 이때 선생은 세밀한 풍수학적 고찰, 거리상 여건 등을 참고로 하여 지금의 위치인 동작동(안)을 제안하여 최종 결정되었다.
7) 5.16쿠데타 거사일을 앞두고 초조해진 박정희 장군이 선생을 찾은 것은 1961년 5월 14 일이었다. “난 박정희라는 사람입니다. 육군 소장으로 있습니다.” 선생은 박정희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났다. 박 장군의 말이 계속됐다.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적어도 며칠간은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손님의 신상 기밀을 남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 지관들에겐 천기를 누설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로서 박 장군의 입이 열렸다. “그럼 말하겠습니다. 성공할 수 있겠는가, 실패할 것인가만 말씀해 주십시오.” 묵묵히 박 장군의 말을 듣고 있던 선생은 결연한 표정으로 “성공합니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고맙습니다.” 선생은 중간에 박 장군의 말을 가로막으며 “이젠 박 장군과 저는 같은 운명입니다. 성공할 것인즉 안심하십시오. 내가 비밀을 발설해 장군의 성공을 거스르지는 않겠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이틀이 지난 5월 16일 선생은 5.16군사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주변에서는 갑작스러운 정치정세 변화에 모두들 놀랬지만 선생은 평정심 그대로였다. 박 장군의 집권은 선생으로 하여금 역술과 지관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8) 5.16쿠데타의 성공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선생은 그 후 1970년대 중반까지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 등으로 청와대 내에서나 밖에서 박 대통령을 자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뒤 영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접한 선생은 술집에서 정신없이 취해 가지고는 곧장 고향인 시흥시 군자동 구지정으로 향했다. 이때 청와대에서는 국장 준비 때문에 관계자들이 선생을 찾기 위해 선생의 사무실과 서울 전역에 수소문 을 했다.
다음날 새벽에야 고향집으로 연락이 닿아 아침 일찍 선생은 부랴부랴 청와대로 들어갔다.
박대통령은 김종필(金種泌), 육인수(陸寅修, 육영수여사 오빠)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묘지선정과 장례절차에 대해 몇 마디를 물었다.
“지선생, 고인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명당에 안장해 주십시오.” 이야기를 끝낸 선생은 그 길로 동작동 국립묘지로가 육여사를 안장할 명당자리를 찾았고 하관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본래 계획으로는 대전 부근에 또 하나의 국립묘지를 만들어서 두 사람의 묘터를 그곳에 만들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획만 수립해 놓은 상태여서 생각보다 먼저 육여사가 운명하여 어쩔 수 없이 동작동 국립묘지를 택했다고 한다.
육여사가 서거한 지 5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에 박대통령의 비보를 들은 선생은 그 충격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청와대에서 찾아온 사람과 집에서 만났다.
차디찬 새벽 공기를 마시며 청와대에 들어간 선생은 김계원 비서실장과 김종필, 육인수씨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김종필, 육인수씨와 장례절차를 협의하고 오후에는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갔다.
이미 묘자리 토질검사를 마치고 육여사 곁으로 모시기로 한 상태였다.
선생이 보기에는 현 위치 오른쪽에 절이 있었는데, 그 뒷편에 자리가 있었으나 그쪽이 더 명당이라 고 주장을 하면 육여사 묘를 이장하든지 두 분을 따로 모셔야 했다고 한다.
9)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선생은 묘터를 잘 잡는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져 경무대 출입을 하며 이승만 대통령과도 면담한 일이 있었다.
1965년 7월 19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90세를 일기로 하와이에서 서거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대통령의 묘지도 선생이 잡아 준 것이다. 이 묘터는 한강 물을 눈앞에 굽어보는 양지바른 언덕에 위치해 있다. 뒤로는 명산인 관악산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앞의 시계가 툭 틔어있는 곳에 위치한, 좌청룡우백호를 제대로 갖춘 자리이다.
10) 선생은 이처럼 대통령의 묘자리를 잡아준 외에도 지난 40여년간 수많은 유명, 무명인사 들의 묘터를 잡아주었다.
전 연세대 총장 백낙준 박사와도 오랜 교분을 유지하며 묘터를 잡아 주었으며,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묘, 이병철의 차남인 새한미디어 회장 이창희묘, 전 법무장관 홍진기묘, 전 국무충리 이범석묘,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부친 묘, 전 국회의장 이재형묘, 버마 랭군 사태 때 희생된 장관들의 묘터도 잡아 주었다.
선생은 비록 유명 인사들의 묘터만을 선정해 준 것이 아니었다.
동작동 국립묘지 외에도 대전 국립묘지를 비롯하여 대전 정부청사, 한강 종합 개발도 자문에 응했다고 하나 실제는 선생의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밖에도 고속도로를 내거나 공단입지를 선정할 때도 선생이 풍수지리에 따른 역리학적 접근의 의견을 제시해 줬다고 한다.
11) 1945년 풍수에 입문한 선생은 한편으로는 학업에 연마하여 이해 일본 WUM 정치대 를 졸업한 뒤 1980년에 UNION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밖에도 기관, 단체 등에서 많은 사회활동 했다.
47세에 한국역리인협의회 부회장을 시작으로 2년 뒤 한국역리학회부회장.
51세에 국방부 국립묘지 자문위원, 한국역술인협의회 회장겸 한국 역리학회 창립회장, 54세에 월간 [역우지] 발행인, 이듬해 국방부 국립묘지 고문, 58세에 일본 유니온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 취득, 59세에 평화통일협의회 운영위원, 한일문화친선협회 상임고문, 63세에 동경 WUM 정치대학 객원교수, 국제역학학술대회 창립회장, 64세에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중앙이사, 67세에 시흥군지 집필위원, 69세에 남북코리아 미술교류협의회 이사, 70세에 안양시지 집필위원, 71세에 충주지씨 중앙총친회회장겸 족보편찬위 위회장 등을 역임했다. 상훈으로는 1985년에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선생은 재가불자와 바른 역술인 양성을 위한 법왕불교대학(학장 유지안스님)의 명예총장(1992년~1998년)을 하였다.
12) 저서에 [한국지리총람(1977)]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이여(1998)]가 있다. 여가에 취미로 익힌 글씨와 그림 솜씨가 이미 아마츄어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서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13) 선생은 슬하에 4남 3녀를 남겨둔 채 후두암으로 인하여 78세를 일기로 1999년11월 10일 건국대 서울병원에서 운명하여 5일장으로 이 해 11월 14일 고향의 후배인 군자동 구지정 마을 주민들에 의해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옥계리 군자봉 아래에 '옥녀가 군자에게 진상 을 바치는 형상(옥녀봉반형)'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선생의 묘터는 “지씨(池氏)들이 머물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지정골인데 묘 작업을 했을 때 이곳 묘터에서 다섯 빛깔을 지닌 오색 골토가 나왔다고 할 만큼 명당 중에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다.